“한국만 사실상 사각지대”…시민사회, 집단소송법 제정 촉구“세계 주요국은 이미 도입…옵트아웃·징벌적 손해배상·입증책임 전환 필요”소비자·시민단체들이 대규모 소비자 피해 구제를 위한 집단소송법의 조속한 제정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들은 한국이 세계적 경제 규모와 디지털 인프라를 갖추고도 소비자 집단구제 제도에서는 사실상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며, 올해 안에 관련 입법을 마무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비자 보호를 위한 집단소송법 제정연대’는 17일 오후 2시 서울 참여연대 지하 느티나무홀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세계 주요국의 집단소송제도 도입 현황과 제도 설계를 담은 팩트북 ‘집단소송법의 정석’ 발간 취지를 설명했다. 이번 연대에는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를 비롯해 경실련, 디지털정의네트워크, 민생경제연구소,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정보인권연구소, 참여연대 등 19개 소비자·시민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19개 소비자·시민단체, 팩트북 발간 기자간담회 개최
제정연대는 최근 SK텔레콤, 쿠팡, 롯데카드, KT 등에서 잇따라 발생한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태를 거론하며, 현행 민사소송 체계로는 다수 피해자에 대한 실질적 구제가 어렵다고 지적했다. 현행 제도에서는 소송의 효력이 소를 제기한 당사자에게만 미치기 때문에, 수천만 명 규모의 피해가 발생해도 개별 피해자가 각각 소송을 제기해야 하는 구조라는 것이다.
이들은 실제로 지난해 2,300만 명 규모의 SK텔레콤 개인정보 유출과 3,370만 명 규모의 쿠팡 개인정보 유출 사태에서도 실제 소송 제기 비율은 1%에도 못 미쳤다고 설명했다. 또 가습기살균제 사건이나 대진침대 라돈 검출 사태처럼 피해 규모는 방대하지만 개별 소송만으로는 충분한 배상과 신속한 피해 회복이 이뤄지지 못한 사례를 대표적 한계로 제시했다.
해외와 비교하면 제도 공백은 더욱 뚜렷하다는 것이 제정연대의 주장이다. 2016년 애플의 아이폰 고의 성능저하 사건의 경우 미국 소비자들은 집단소송을 통해 약 6천억 원 규모의 민사합의를 이끌어냈지만, 한국에서는 약 6만 명이 소송에 참여하고도 1심 패소를 겪은 뒤 항소심에서 소송을 유지한 7명에게만 1인당 7만 원의 배상이 인정됐다. 폭스바겐 배기가스 조작 사건 역시 미국에서는 차량 1대당 최대 1,350만 원 수준의 배상이 이뤄졌지만, 한국에서는 1대당 약 100만 원 수준에 그쳤다.
제정연대는 이 같은 차이가 결국 집단소송제도 유무에서 비롯된다고 짚었다. 대규모 피해가 발생해도 기업이 부담해야 할 비용이 제한적이면, 제품 안전이나 개인정보 보호를 위한 선제적 투자보다 사후 분쟁 대응이 더 경제적이라는 왜곡된 유인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소비자 피해를 반복적으로 양산하고, 기업의 책임 있는 시장 행위도 저해한다고 비판했다.
이날 소개된 팩트북 ‘집단소송법의 정석’은 세계 각국의 집단구제 제도를 비교·분석한 자료집이다. 제정연대에 따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가운데 한국을 제외한 37개국이 사실상 집단구제 제도를 도입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형식적으로 집단소송제가 없다고 분류되는 일부 국가들도 위법확인소송, 권리양도 방식, 대표소송 등 유사한 구제 장치를 운용하고 있어, 사실상 한국만 제도적 공백 상태에 가깝다는 설명이다.
팩트북은 특히 집단구제 제도의 핵심으로 옵트아웃(Opt-out) 방식을 강조했다. 옵트아웃은 피해자가 별도로 제외 의사를 밝히지 않는 한 자동으로 집단에 포함되는 방식으로, 소액 다수 피해에서 낮은 참여율로 제도가 무력화되는 문제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서 옵트인 방식이 참여 저조와 실효성 부족으로 한계를 드러낸 반면, 미국·캐나다·호주·포르투갈·네덜란드 등은 옵트아웃 또는 하이브리드 제도를 통해 보다 강한 구제 효과를 보이고 있다는 점도 소개됐다.
이은우 변호사(법무법인 지향·디지털정의네트워크 자문위원)는 팩트북을 통해 “옵트아웃은 집단구제 제도의 본질과 연결된다”며 “소액 피해자의 권리 포기를 막고, 기업의 불법행위 억제 기능을 실질적으로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옵트아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우리 헌법상 옵트아웃 도입을 금지하는 명시적 제한은 없다”며 “한국의 디지털 인프라를 활용하면 집단소송 시스템을 충분히 활성화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 변호사는 또 한국 현실에서 소비자단체 독점형 모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진단했다. 유럽 일부 국가처럼 오랜 기간 금지청구소송과 단체소송 경험을 축적한 대형 소비자단체 인프라가 국내에는 아직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개인 대표당사자형과 단체소송형을 병행하는 현실적 제도 설계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제정연대는 한국 사회가 집단소송제도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조건에 들어섰다고 보고 있다. 대규모 플랫폼과 빅테크, 금융 과점 구조, 프랜차이즈와 자영업 비중, 하도급 및 공정거래 분쟁의 빈도 등을 고려할 때 소비자뿐 아니라 중소기업, 영세상공인까지 집단구제의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개인정보 유출, 플랫폼 갑질, 금융 소비자 피해, 담합, 제조물 결함 등은 모두 개별 소송만으로는 실효적 해결이 어렵다고 진단했다.
제정연대는 한국형 집단소송법이 단순한 소송 절차 도입을 넘어,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와 입증책임 전환, 그리고 실질적 피해 회복 장치까지 함께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업이 정보와 자료를 독점한 상황에서 일반 소비자가 불법행위를 입증하기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으며, 인공지능과 플랫폼 중심 경제가 확대될수록 ‘블랙박스’형 피해는 더 늘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미 문재인 정부 시절 집단소송법 정부안이 발의된 바 있고, 이재명 대통령 역시 집단소송제 도입 필요성을 언급한 만큼 더 이상 입법을 늦출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제정연대는 “반복되는 소비자 권리 침해를 실질적으로 구제하기 위해 최소한 올해 안에는 관련 법안을 처리해야 한다”며 “정치권과 언론, 시민사회가 세계 각국의 제도 운영 경험을 참고해 생산적인 논의를 시작해야 할 때”라고 촉구했다.
한편 제정연대는 팩트북 ‘집단소송법의 정석’을 3월 중 공식 발간한 뒤 PDF와 자료집 형태로 무상 배포할 계획이다. 이 자료집은 향후 집단소송제도 도입 논의 과정에서 정치권, 언론, 시민들이 참고할 수 있는 기초 자료로 활용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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