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법원에서 먼저 소송이 진행 중이더라도 국내 법원에 동일한 소를 다시 제기한 것을 곧바로 ‘중복제소’로 볼 수 없다는 서울고등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국제적 소송경합 상황에서 국내 후소를 일률적으로 각하할 수 없다는 법리를 명확히 제시한 판결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서울고등법원 제6-2민사부(재판장 권순민 부장판사)는 중국 국적의 원고 A씨가 대한민국 국적의 피고 B씨를 상대로 제기한 대여금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1심의 소각하 판결을 취소하고 사건을 서울중앙지법으로 돌려보냈다.
사건은 중국에서 먼저 시작됐다. 원고는 2017년 중국 법원에 피고를 상대로 약 2억4천만 위안 규모의 대여금 반환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이후 제주도 소재 피고 소유 토지에 대해 가압류 결정을 받은 뒤, 법원의 제소명령에 따라 2019년 국내 법원에도 동일 취지의 본안 소송을 냈다.
이에 대해 피고 측은 “이미 중국에서 동일 사건이 진행 중인 만큼 국내 소송은 국제적 중복제소에 해당한다”며 각하를 주장했고, 1심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민사소송법 제259조의 ‘법원에 계속 중인 사건’은 국내 법원 사건만을 의미한다고 봤다. 따라서 외국 법원에 계속 중인 사건에는 중복제소 금지 규정이 직접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국내 법원에 후소를 제기하는 것 자체를 금지하는 실정법상 규정을 발견할 수 없다”며 “국제적 소송경합의 경우 후소를 일률적으로 부적법하다고 보면 불합리한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재판부는 2022년 전부 개정된 국제사법 제11조를 주목했다. 개정 국제사법은 국제적 소송경합 상황에서 외국 재판의 승인 가능성이 예상되더라도 국내 후소를 바로 각하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소송절차 중지’로 조정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재판부는 “외국 법원의 확정판결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단계에서는 국내 후소를 곧바로 각하할 수 없고, 국내 법원이 소송절차를 중지하거나 계속 심리하는 방식으로 조정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또 “외국 판결이 장차 대한민국에서 승인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국내 후소를 바로 각하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이번 판결은 국제거래와 해외 투자 분쟁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외국과 국내에 동시에 소송이 제기되는 ‘국제적 소송경합’ 사건 처리 기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법조계에서는 특히 “외국 판결 승인 가능성을 사전에 단정하기 어렵고, 외국 소송 절차가 장기간 지연될 가능성도 있는 만큼 국내 재판청구권 보장 측면을 고려한 판단”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한편 재판부는 중국 법원 판결의 국내 승인 여부나 대여금 채권의 실체적 타당성 등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고, 국제적 중복제소 여부에 대해서만 판단한 뒤 사건을 1심으로 환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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