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측천 武則天' 치밀한 준비로 중국의 유일한 여황제가 되다 (上)

이정랑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20/04/02 [10:20]

'무측천 武則天' 치밀한 준비로 중국의 유일한 여황제가 되다 (上)

이정랑 칼럼니스트 | 입력 : 2020/04/02 [10:20]



측천무후는 어떤 인물인가? 그녀는 중국 역사에서 여러 가지 ‘유일’한 기록을 남긴 진정한 여자 황제였다. 그녀는 사후에 유일하게 건릉(乾陵)에 세워진 무자비(無字碑)의 주인공이었고 유일하게 황제와 합장되는 등 갖가지 역사의 ‘유일’한 기록들을 만들어냈다.

 

그만큼 무측천(624~705)의 출현은 중국 역사의 거대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도 남는다. 그녀에 대한 후세인들의 비판적 평가가 분분하긴 하지만 그 누구도 그녀가 남긴 역사의 자취를 지우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산서 문수 출신으로 당 무덕(武德) 7년(624)에 태어났다. 부친은 목재상으로 정3품인 공부상서도독(工部尙書都督) 등의 관직을 지낸 바 있다. 부친의 이러한 경력과 지위로는 간신히 사족의 대열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그 혈통은 여전히 미천한 것으로 여겨졌다.

 

당 태종 정관 12년, 황실에서 편찬한 『씨족지 氏族志』에는 무씨 성이 포함되지 못했고 사회적으로도 무씨는 하급계층의 성씨로 분류되었다. 이는 가문과 출신성분을 매우 중시했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에서 무씨 집안사람들이 높은 권력과 지위를 얻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개혁의 채찍이 안 통하면 비수를 들이대 革新을 꾀했던 대단한 女傑

 

무측천은 당대 상류사회의 부귀영화를 누렸으면서도 여전히 한문(寒門) 출신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출신의 한계는 쟁취하기 불가능한 권력에 대한 그녀의 욕망을 더욱 자극했다. 무측천은 명문 귀족들을 원수처럼 여기면서 한편으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에 열중하는 모순된 심리상태에서 성장했다.

 

실제로 그녀에게서 귀족의 기질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정관 16년(636) 1월, 장손황후가 서거하자 그 이듬해에 태종은 무측천이 용모가 단아하고 행실이 방정하다는 소문을 듣고 그녀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재인(才人)으로 봉하고 ‘무미(武媚)’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입궁 당시 그녀의 나이는 불과 열네 살로, 부모 곁을 떠나기 어려운 나이였다. 게다가 입궁이라는 것은 생이별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아직 어린 나이의 무측천은 이를 입신의 기회로 생각했다. 그녀의 모친은 어린 딸과의 이별을 슬퍼하며 눔물을 보였지만 무측천은 오히려 모친을 위로했다.


“천자를 모시러 들어가는데 이런 복이 또 어디 있겠어요? 이렇게 우시면 저까지 슬퍼지잖아요!”

 

무측천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운 데다가 사서를 즐겨 읽어 정사와 인정에도 밝았다. 송대 나대경(羅大經)이 쓴 『학림옥로 鶴林玉露』라는 책에 기록된 일화는 거의 잔인함에 가까울 정도의 결단력 있는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중국 서북 변방의 이민족인 토번(吐蕃)이 태종에게 ‘사자총(獅子驄)’이라 불리는 명마 한 필을 공물로 보내왔다. 매우 거칠고 야성이 강한 말이라 다루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사냥을 좋아하는 태종은 직접 이 말을 길들이려 했지만 제압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던 무측천이 큰 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는 것 같군요!”

 

태종이 무측천에게 명마를 길들일 방법을 묻자 그녀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제겐 말을 길들일 수 있는 세 가지 도구가 있습니다. 먼저 쇠 채찍으로 후려쳐서 말을 듣지 않으면 쇠몽둥이로 호되게 두들겨 패는 것입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비수로 목을 찌르는 것입니다.”

 

어린 궁녀가 이처럼 대담한 기백을 보이자 태종은 놀라움과 함께 두려운 마음을 금치 못했다.


스물여섯 살까지 무측천은 궁중에서 화려한 생활을 하며 세월을 보냈다. 정4품인 재인의 신분으로서는 황제의 생활을 보살피는 것 외에는 달리 총애를 살만한 방법이 없었다. 얼마 후 태종이 중병에 걸리자 무측천은 태자 이치(李治)를 만나기 위해 수시로 궁중을 드나들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그녀는 일생을 자신보다 네 살 어린 태자에게 의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태자에게 접근하여 그의 호감을 살 방법을 강구 하게 되었다.

 

성품이 유약하고 매사에 자기주장이 없었던 태자 이치는 무측천처럼 단아하고 아름다운 데다가 일 처리에도 능한 젊은 여인을 만나자 금세 마음이 기울었다.

 

태종은 병세가 중해지면서 전한 시대에 여후가 전권을 휘둘렀던 일이 재연될 것이 두려워 무측천에게 사약을 내릴 것을 결정했다. 어느 날 태종이 무측천에게 말했다.


“짐은 병에 걸린 이후로 백약이 무효한 채 증세만 더 가중될 뿐이다. 여러 해 동안 날 보살펴온 널 이대로 두고 떠날 수가 없을 것 같구나. 네 생각은 어떠하냐?”

 

영리한 무측천은 태종의 의도를 알았다. 천성이 침착하고 결단력이 강한 그녀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표정으로 태종에게 말했다.


“소녀가 폐하의 은총을 입었으니 죽음으로 폐하의 은혜에 보답해야 할 줄 압니다. 하지만 폐하의 옥체가 아직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죽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머리를 삭발하고 검은 옷을 입은 승려가 되어 폐하를 위해 기도를 올림으로써 폐하의 은덕에 보답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무측천의 이러한 대답은 그녀의 기지를 바로 보여준 사례였다. 출가하여야만 목숨을 보전할 수 있다는 점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너무나 진지한 무측천의 대답에 태종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다! 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당장 궁을 떠나거라!”

 

태종의 승낙은 대 사면령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황급히 짐을 꾸려 출가를 준비했다. 태자는 그녀를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저 태종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애를 죽일 생각이었지만 마음이 개운치 않은 때 삭발을 하고 출가하겠다는 말에 그렇게 하도록 허락했다. 비구니가 정권을 농락했던 전례는 없었으니까 말이다.”

 

얼마 후 태종은 세상을 떠났고 무측천은 감업사로 보내져 승려가 되었다. 태자 이치는 황위에 올랐지만, 그녀를 다시 데려올 명분이 없었다. 1년 뒤, 고종은 태종의 기일을 맞아 감업사로 향을 올리러 갔다가 우연히 무측천을 보았다. 사실 고종은 그동안에도 무측천이 몹시 그리웠지만, 태종을 모셨던 여자이기 때문에 감히 궁중으로 데려오지 못했다.

 

그런데 당시 고종이 소숙비(蕭淑妃)를 총애하자 이를 질투하고 있던 황후가 고종의 총애를 분산시키려는 목적으로 무측천을 다시 궁중으로 데려오도록 종용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고종은 못 이기는 척하며 마침내 무측천을 다시 궁중으로 맞아들였다.

 

궁중으로 돌아와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한 무측천은 비굴할 정도로 공손한 태도로 황후를 모시기 시작했다. 황후도 그녀를 좋아하여 고종의 면전에서 여러 차례 그녀를 칭찬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고종의 총애가 무측천에게 집중되자 소속비와 황후는 연합하여 무측천에 대항하게 되었다. 이때 무측천은 소의(昭儀)에 봉해져 이전과 다른 신분이었다. 그녀는 권력의 자리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올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황후는 문벌귀족 세력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무측천이 임신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황후는 자신에게 아이가 없다는 사실에 크게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는 외삼촌인 중서령 유상(柳爽) 등과 연합하여 후궁 유씨의 아들이자 고종의 장자인 이충(李忠)을 태자로 세우고 장손무기, 저수량(褚遂良), 한원(韓瑗), 우지녕(于志寧), 장행성(張行成), 고계보(高季輔) 등의 중신들을 태자를 보필하게 함으로써 철통같은 보신 전략을 펼쳤다.

 

이 같은 궁정 내외의 연합에 무측천은 큰 자극을 받았다. 이때 그녀는 자신의 지지 세력이 없는 것이 변변치 않은 가문 출신의 한계임을 뼈저리게 느끼고, 정상적인 수단으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강한 장애나 공격에 부딪히면 더욱 분발하는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무측천은 황후나 소속비의 눈 밖에 난 사람들을 대거 받아들이고 인심을 얻는 데 주력했다. 고종으로부터 받는 상금은 전부 측근들에게 나눠주면서 황후와 소속비의 일거일동을 보고하게 하여 이를 고종에게 일러바쳤다. 하지만 이처럼 소극적인 행동으로는 질투심에 불타는 두 여인을 제압하기에 부족했다. (中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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