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 曹操' 시대를 초월한 진정한 영걸이다-上

[다시 읽고 새로 쓰는 고전소통] 人物論(08) 문무를 겸비한 희대의 영웅

이정랑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20/05/03 [09:47]

'조조 曹操' 시대를 초월한 진정한 영걸이다-上

[다시 읽고 새로 쓰는 고전소통] 人物論(08) 문무를 겸비한 희대의 영웅

이정랑 칼럼니스트 | 입력 : 2020/05/03 [09:47]

 

내가 세상을 저버릴지언정 세상이 나를 저버리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중국 역사에서 조조(曹操.-155~220)만큼 양극단의 평가를 받는 인물은 드물 것이다. 정사(正史)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陳壽.-233~297)는 “조조야말로 비범한 인물이었으며, 시대를 초월한 영걸이었다.(非常之人, 超世之傑)”라고 평했다.

 

 

 

하지만 나관중(羅貫中.-1330~1400?)이 쓴 소설인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조조는 악행을 대표하는 인물로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이러한 상반된 평가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소설 『삼국지연의』의 영향과 유행으로 조조는 부정적인 인물로 인식되고 있다.

 

조조는 후한(後漢) 말기의 관료이자 위(魏)나라 건국의 기틀을 마련한 정치가이다. 그의 자는 맹덕(盟德)이고 어릴 때 이름은 아만(阿瞞)이다. 패국(沛國) 초현(譙懸.-지금의 안휘성 박주시)에서 출생하였다. 조조의 아버지 조숭(曹嵩.-?~193)은 환관 조등(曹藤)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조등은 환제(桓帝) 때 중상시를 맡았고 이후 비정후(費亭侯)라는 작위가 봉해졌다.

 

아버지 조숭은 조등의 작위를 이어받아 태위(太衛.-최고의 군사장관인 1품 관직)에 이르렀지만, 이러한 가계의 영향으로 조조는 ‘환관의 자손’이라는 이름표가 붙게 되었다. 할아버지 조등은 30년간 네 임금을 섬겼는데 잘못을 저지른 일이 없다고 한다. 그 당시 변고가 무상했던 조정에서 무사히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뛰어난 처세술 때문일 것이다. 뒷날 조조라는 인물이 보여준 다재다능한 능력은 이러한 환경에서 이미 그 기초가 다져졌음을 부인할 수 없다.

 

조조의 어린 시절은 너무나 평범하여 중국 역사상 훌륭한 인물들에 수식어처럼 붙었던 어떠한 이적(異蹟)이나 기이한 풍모(風貌)도 찾아볼 수 없다. 정사 『삼국지(三國志)』 「무제기(武帝紀」에 “조조는 어려서부터 기지와 권모술수가 있었고, 의협심이 강하고 행동이 거리낌이 없었으며, 학업에는 열중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았다.”고 전한다.

 

조조가 벼슬길에 나선 것은 스무 살 무렵이다. 지역에서 매년 효도와 청렴한 사람을 추천하는 효렴(孝廉)에 선정되어 낭(郎)이 되었으며, 얼마 후에 낙양의 치안을 담당하는 북부위(北部尉)가 되어 관료 생활을 시작한다. 이후 기주(冀州)의 돈구현에 현령(縣令)으로 전출되었다가 수도인 낙양(洛陽)에 진출하여 황제의 자문역인 의랑(議郞)이 되어 출세 가도를 달린다.

 

조조가 활동한 당시의 중국은 후한 왕조가 무너지고, 약 100여 년에 걸친 긴 전란의 시대가 막을 연다. 2세기 중엽부터 외척과 환관의 세력 다툼으로 흔들리기 시작하던 후한의 정치는 폭정으로 치달았다. 결국 184년 민중들의 생활이 황폐해지자 장각(張角)이 세운 태평도(太平道)의 신도가 주축이 되어 ‘황건(黃巾)의 난’이라 불리는 민중봉기가 일어난다.

 

이때 조조는 서른 살로 기도위(騎都尉)에 임명되어 황건적 진압에 공을 세운다. 이 공적으로 10개 현(縣)을 관할하는 제남 지역의 상(相)으로 승진한다. 조조는 부임 후 뇌물과 향락에 물든 관리들을 모조리 파면하였으며, 당시 유행하던 음사(淫祀)와 같은 민간신앙을 모두 금지하고 악습을 혁파하였다. 그 후 동군태수(東郡太守)에 임명되었지만 돌연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가 은거한다. 이때 조조의 맞수라 할 수 있는 유비(劉備.-161~223)는 관우, 장비와 함께 황건적을 공격한 공로로 기주의 작은 고을인 안휘현 현위가 된다.

 

한편 후한의 조정은 일대 혼란이 가중된다. 189년 황제인 영제(靈帝)가 죽고 어린 유변(劉辯)이 즉위하자 외척인 하진(何進)은 대장군이 되어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하진은 원소(袁紹)와 원술(袁術)을 등용하여 환관들을 제압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계획이 누설되어 하진이 피살되자 원소는 환관 2천여 명을 몰살한다. 이때 양주(涼州)의 제후였던 동탁(董卓)이 낙양에 입성하여 권력을 쥐게 된다.

 

동탁의 위세는 황제를 넘어섰고, 폭정에 백성들은 물론 지배 계급에서도 동탁에 대한 불만이 커지게 된다. 동탁은 황제와 하태후를 내쫓고 9살이던 유협을 즉위시킨다. 그가 한나라의 마지막 황제 헌제(獻帝.-181~234)이다.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후한 말기의 불안정한 정국 속에서 각지에서 할거하던 군웅들이 패권 다툼을 시작한다.

 

권력을 장악한 동탁은 조조를 중용 하고자 하였으나 조조는 성(城)을 탈출하여 낙양을 떠난다. 고향에 도착한 조조는 사재를 털어 의병을 모집하여 동탁과 맞설 준비를 했다. 다음 해 원소를 맹주로 반(反)동탁 연합군이 형성되자 조조가 군사를 이끌고 연합군에 합류한다. 그러나 동탁군이 워낙 강력했기 때문에 제후 중 누구도 선두에 나서길 주저했다.

 

조조가 홀로 군사를 이끌고 싸웠지만 대패했다. 191년 조조는 황건적의 잔여 세력을 토벌해 원소로부터 동군태수에 임명된다. 192년 조정에서는 동탁이 그의 부하였던 여포(呂布)에 의해 살해된다. 이때 조조는 연주목(兗州牧)에 임명되어 수장(壽張) 지방으로 진군하고 100만여 명에 달하는 청주의 황건적 잔당을 정벌했다. 당시의 군웅들은 황건적을 소탕할 대상으로 여겼겠지만, 조조는 황건적의 항복과 동시에 그들의 귀순을 받아들인다. 이로써 조조는 일거양득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첫째는 군사적 열세를 극복할 수 있었으며, 둘째는 황건적의 노동력을 이용한 경제력 확보였다. 조조는 이들 가운데 정예의 병력을 선발해 독자적인 ‘청주병(靑州兵)’을 조직하였는데, 이들은 조조의 주력부대가 된다. 이 무렵부터 조조는 순욱(荀彧)을 비롯한 많은 참모를 모을 수 있었고 각지의 군사들이 연이어 귀속함으로써 세력이 급성장하게 된다.

 

196년 조조는 헌제를 옹립하여 대장군으로 임명되고 수도를 낙양에서 허창(許昌)으로 옮긴다. 그리하여 조조는 전쟁의 정치적 명분을 세우고 중앙정권을 장악함으로써 조정 대신의 임명권과 군사권을 헌제의 명의로 이용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여러 개혁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같은 해에 참모 한호(韓浩)의 건의를 받아들여 둔전제(屯田制)를 시행한다.

 

이 제도는 임자 없는 농경지를 둔전(屯田)으로 하고 유민(流民)을 모아, 농사를 지어 둔전민(屯田民)을 두는 것이다. 이 둔전제는 당시 징병제도의 한계를 보완하고 백성들의 기근 문제도 해결할 수 있어 농민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다. 이는 유민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황무지를 개간함으로써 국가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유지하는 이중효과를 달성하였다.

 

이 무렵 유비가 여포에게 하비(下邳)를 빼앗겨 조조에게 의탁하였다. 참모 정욱(程昱)은 조조에게 유비를 제거하도록 진언하지만, 조조는 다만 유비에게 먹을 것을 하사하였다. 혼란 속에 계속되는 전쟁과 식량부족으로 무너지는 군벌들이 속출하였으나 조조는 둔전제의 성공으로 천하를 장악할 수 있는 기반을 쌓게 된다.

 

197년, 조조는 완(宛.-형주 남양군의 현)에 출정하여 남방의 군벌이었던 장수(張繡)를 항복시킨다. 다음 해에는 장수와 유표(劉表)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하남 일대를 장악한다. 이때 원소는 북방에서 큰 세력을 지녔던 공손찬(公孫瓚)을 물리쳐 북방 4개주[청(靑)‧기(冀)‧유(幽)‧병(幷)]를 차지하였고 요동의 공손강(公孫康)과 연합하여 황하(黃河) 이북을 통치하고 있었다.

 

199년, 조조는 원술을 토벌하기 위해 유비를 출정시켰지만, 유비는 재빨리 조조를 배신하고 원소와 강화를 맺었다. 이에 조조는 친히 출정하여 유비를 격파하고 관우를 생포한다. 200년, 형주에서 장수가 부하들을 거느리고 조조에게 투항하게 된다. 이에 다급해진 원소는 10여 만의 대군을 이끌고 수도 허창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조조가 관우를 선봉장에 세워 전투에 임하게 한다.

 

그러나 관우는 조조를 떠나 유비에게 돌아갔다. 결국 2~3만 명의 군사로 관도(官途)에서 대치하던 조조는 5천여 명의 정예군을 이끌고 원소군의 후방을 습격하여 식량기지를 불태우고 대승을 거둔다. 이때 조조의 부하들과 원소가 내통한 문건들이 많이 발견되었으나 조조는 부하들을 엄벌하지 않고 문건을 모두 불살라 버렸다. (下에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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