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음지에서 외쳤던 '검찰개혁'은 시대의 과제 되었다

박경범 / 작가, 前전국공권력피해자연맹 홍보국장 | 기사입력 2020/06/21 [04:25]

그들이 음지에서 외쳤던 '검찰개혁'은 시대의 과제 되었다

박경범 / 작가, 前전국공권력피해자연맹 홍보국장 | 입력 : 2020/06/21 [04:25]

우리사회에 공권력 피해 구조와 사법개혁에 대한 문제의식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대략 1990년대 부터다.

 

80년대 민주화에 대한 욕구가 폭발적으로 분출된 후 이 시기 사법현실에 눈 뜨고 있었으나 그 운동성은 미약했다.

 

공권력 피해자 구조와 사법개혁을 위한 시민운동은 누구에게나 자발적으로 관심을 가질만한 보편적인 이념운동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젊고 사회의식 있는 운동가들의 지원을 받기 어려워 사법개혁 시민단체는 직접 피해를 당한 중. 노년 층 위주로 끌어가야 했다. 조남숙 단장은 이 시기부터 사법개혁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 자신 운동의 참여 동기는 1996년경 남편이 근무했던 연세대학교에서의 부당한 처우와 이에 관련한 사법기관의 부당한 수사와 판결 때문이었다. 이를 계기로 많은 사법피해자를 접하며 이끌어주는 역할을 숙명과 같이 맡아하게 되었다.

 

 

 

2000년대부터 사법개혁 시민운동의 중요영역으로

 

조남숙 단장이 이끌어왔던 ‘공권력피해구조연맹’과 ‘사법정의국민연대’가 매달렸던 사법개혁은 2000년대를 지나면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시민운동의 주요한 영역이 되어갔다. 이에 사법개혁운동 단체를 영향력 있는 큰 조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모였다. 이에 명망 있는 변호사와 법학교수들이 자천타천으로 이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조남숙 단장도 그간 피해 당사자로서의 활동이 힘겨웠던 현실을 받아들여 유명 변호사와 법학교수의 영입을 직접 추진했다.

 

그러나 현실은 부당한 재판과 싸우는 것보다 힘들었다. 영입한 법률전문가들은 공권력피해 구조라는 시민운동의 동지로서 함께 하기보다는 자신의 경력 쌓기 용에 골몰했다.

 

변호사는 피해자와 관련한 사건수임은 받되 함께 단체를 이끌어 나가기 위한 운동지원에는 비협조적이었다. 법학교수는 단체의 피해자들에게서 학교에서 받았던 대우를 바라는 듯 했다. 시민운동가로서 함께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은 손해 보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현행 사법시스템에서 법률전문가인 그들은 갑이고 사법피해자는 을이라고 하지만 시민운동 차원에서는 그들의 마음가짐이 달랐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진한 아쉬움이 남는 시간이었다.

 

더욱 아쉬운 것은 그들 전문가들 중에는 갖은 술수를 써서 조남숙 단장을 몰아내고 단체의 대표 자리를 차지했던 인사도 있었다는 점이다. 또 그렇게 그들이 전공련을 차지했던 기간 중에는 공권력피해자 구조 등의 활동은 진행되지 않았다.

 

전공련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노무현 대통령 임기 초에 법무부장관 추천 등 사법개혁정책의 추진에 많은 힘을 보탰다. 그러나 기대하는 만큼 사법개혁은 진행되지 않았다. 평검사와의 대담 등 요식적인 행위만 있었을 뿐이다.

 

이에 전공련은 노무현 대통령 임기 내 사법개혁의 성과를 낳게 하고자 압박에 나섰다. 즉 사법개혁이라는 대국적인 목표를 향해 자체 역량을 총동원한 시위 등을 통해 노 대통령 임기 내에 적극적 행보를 취해줄것을 호소 했었다.

 

 

 

영향력이 증대되자 탄압 받은 조남숙 단장

 

전공련이 사법피해자 구조의 목소리를 점차적으로 높여가자 검찰로서는 눈에 가시로 여겼다. 검찰은 자신들의 권력에 흠집을 내고 있는 조남숙 단장을 그냥 두지 않았다.  

 

그는 전공련 단장을 맡으며 사법피해자들로부터 소송에 임하는 자세 등에 관한 자문에도 역량을 쏟았다.

 

조 단장은 사법피해자인 회원들을 구조하기 위해 받은 회비 및 행사비용을 협조 받았다.

 

그럼에도 검찰은 7명의 회원에게 450만원을 갈취 했다며 구속 기소하면서 10개월의 형을 살아야만 했다.  

 

그러나 재판결과 200만원은 부실 변론을 한 변호사에게 준 착수금을 받아주고 그동안 지출된 경비로 받은 것이었다. 150만원은 억울하게 옥살이하고 있는 피해자를 1년 동안 구조해준 과정에서 소요된 비용이었다. 이와 함께 회원 4명으로부터 연회비로 10만원~30만원을 받은 게 그 전부였다.

 

그러나 언론은 검찰이 기소 전 단계에서 흘린 정보를 가지고 ‘사건을 해결해 준다는 명목으로 사기 친 시민운동가 구속’이라는 타이틀로 20여 매체가 허위보도를 했다.

 

조 단장은 피해자들에게 그 어떤 손해도 끼친 게 없다는 취지의 판결을 받았다. 조 단장이 변호사도 없이 나 홀로 소송으로 이끌어낸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판결은 이상했다. 죄는 없지만 변호사가 아니면서 피해자를 구조해준 것이 죄가 된다는 것이었다. 재판부는 이 같은 이유를 들면서 집행유예의 형을 선고했다. 비리 판검사 잡는 운동은 하지 말라는 판결이나 다름없었다. 

 

조 단장은 사법구조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2007년 3월 1일 검찰수사 과정에서 발생한 피해사례를 모은 ‘사기 치는 법, 사기 당하는 법’이라는 책을 펴냈다. 서울법대 40대 총학생회에서는 조 단장을 ‘이 시대 관순 누나’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일일이 거론하기조차 어려운 시련과 탄압 속에서도 조남숙 단장의 시민단체 활동이 성공한 운동이었음을 보여준다.

 

지난해 가을 서초동에 뜨겁게 타오른  검찰개혁과 사법개혁 열망의 촛불이다. 검찰개혁과 사법개혁이 완전히 국가적 이슈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 준것이다.

 

조국 전 장관에 대한 무리한 수사를 비판하며 검찰개혁을 요구한 지난해 촛불은 조남숙 단장과 그 회원들이 구석진 응달에서 해왔던 운동이다.

 

공수처 출범을 앞두고 있으면서 사법개혁의 과제는 정치권과 국민의 수중에 넘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곧 조남숙 단장이 이끌어온 사법개혁 운동의 성공을 의미한다.

 

 

 

공수처 전과 후는 사법개혁운동에 있어서도 그 획을 그을 것으로 본다. 이때문에 조남숙 단장이 이끌어온 시민단체는 불가피하게 변화를 맞이할 것이다.

 

이상적인 관점에서는 정부가 그 일을 다 해주니 해체하여야 가장 바람직 할 것이다. 하지만 사법문제는 사람의 일이라 앞으로도 어떤 문제가 있을지는 예측하기 힘들다. 다만 사법개혁이라는 큰 줄기의 과제는 이제는 내려놓고 법률행정의 영향 하에 있는 소시민의 사정을 헤아려 제도상의 사각지대가 있는지 살피는 것 등에 그 역할이 있을 수 있다.

 

조남숙 단장은 이미 통상적인 사무작장인 은퇴연령인 65세를 넘었다. 삼십년을 가까이 함께한 사법문제와의 투쟁인생을 돌이켜보는 시간이 된 것이다. 이에 조 단장은 지난 사건들의 회고록을 겸하여, 국가의 사법 행정 하에서 민중과 서민의 권익을 지켜주기 위한 가이드가 되는 지침서 발간을 준비 중이다. 또 그 과업이 완료되는 대로 성공한 시민운동가로서의 명예로운 퇴진도 염두에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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