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서 海瑞' 파면과 복직 거듭하면서도 청렴결백 지킨 관료

[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典疏通]人物論(41) 중국 역사에 보기 드문 名臣

이정랑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20/12/24 [04:49]

'해서 海瑞' 파면과 복직 거듭하면서도 청렴결백 지킨 관료

[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典疏通]人物論(41) 중국 역사에 보기 드문 名臣

이정랑 칼럼니스트 | 입력 : 2020/12/24 [04:49]

 

 

해서(海瑞-1514~1587)는 광동 경산 출신으로 자가 여현(汝賢)이고 호가 강봉(剛峰)이다. 회족(回族)인 그는 청조(淸朝)뿐 아니라 중국 역사 전체를 대표하는 청렴결백한 관료이다.

 

성품이 매우 정직했던 그는 조정의 권력 다툼에 과감히 뛰어들어 여러 차례 황제의 비위를 거스르는 말로 파직당하기도 했지만, 파면과 복직을 거듭하면서 중국 역사에 길이 남는 명신이 되었다.

 

해서는 명 세종 가정(嘉靖) 연간에 과거에 합격한 뒤 남평 교유(敎諭)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호부주사의 자리까지 올랐다. 세종에게 「치안소(治安疏)」라는 글을 올렸다가 미움을 사서 하옥 당하는 위기를 맞았으나 얼마 후 세종이 서거하면서 석방되었다.

 

선조 융경(隆慶) 3년(1569)에 우검도어사가 되어 응천의 순무를 맡게 된 그는 호족세력을 견제하며 조세제도를 바로잡고 오송강(吳淞江)을 준설하는 등 적지 않은 공적을 세웠다. 하지만 현지의 호족과 귀족들의 미움을 사 탄핵을 당하고 관직을 잃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다가 선조 만력(萬曆) 연간에 다시 경검도어사 및 남경 이부시랑으로 등용되었다. 그는 청렴한 관리로 유명했을 뿐 아니라 「역전의(驛傳議)」, 「걸치당사언관서(乞治黨邪言官書)」, 「혁모병소(革募兵疏)」 등 여러 분야에 걸친 방략을 저술로 남긴 뛰어난 지략가이기도 했다.

 

해서가 강남에서 임직하고 있을 때 도어사 언무경(鄢懋卿)이 전국의 소금운송을 총괄하면서 남방을 순유하는 길에 절강에 들른 일이 있었다. 명대 전기에는 주원장의 엄중한 형법 덕분에 비리를 저지르는 관리가 극히 드물었고 관료들에 대한 관리가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으나, 중후기로 들어서면서 관리들의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기 시작했다.

 

언무경은 경사에 있으면서 따로 재물을 챙길 기회가 적었던 터라 이번 순유 길을 대대적인 횡재의 기회로 삼고 있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지방 관리들의 접대를 받으면서 다량의 재물과 미녀를 요구하여 민원이 자자했다. 해서는 이에 분통을 터뜨리고 있던 차에 그가 자신의 관할 지역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이날 언무경은 갖은 위세를 부리며 순안현에 도착했다. 관리들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는데 익숙해진 그는 이번에도 대단한 환영 준비가 되어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성 부근에 당도했는데도 영접 나온 관원들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거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남루한 옷에 형색이 거지와 다름없는 사람들이 다가와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언무경이 그들을 향해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대들은 대체 뭐 하는 사람들인가?”

 

남루한 차림의 일행 중 하나가 대답했다.

 

“소관은 해서라고 합니다. 어사대인을 모시러 나왔지요.”

 

이 말에 언무경은 불에 기름을 끼얹은 듯 더욱 화를 냈다. 그는 거지 행색의 관리가 바로 이곳의 지현이란 사실을 잘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척하며 되물었다.

 

“순안 지현은 어디 갔소? 어째서 아직 안 나오는 게요?”

 

해서가 고개를 들고 뚜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관이 바로 순안 지현입니다. 어찌 감히 대인을 영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언무경은 해서의 당당한 모습을 보고는 더욱 소리를 높여 질책했다.

 

“그대는 조정의 법도와 군율도 모르는 게요? 어째서 이처럼 남루한 행색으로 관교도 타지 않고 온 거요? 관리의 체통은 다 어디 갔단 말이오? 나를 모욕하기 위해, 일부러 이러는 것이오?”

 

대화는 해서의 생각대로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었다. 그는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은 어두로 대답했다.

 

“소관은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밖에 모릅니다. 백성들이 편안하게 사는 것이 바로 관리의 체통이지요. 대인의 질책을 들으니 뭔가 크게 잘못한 것 같은데, 소관이 조정의 어떤 법도를 어겼는지 하교해 주시기 바랍니다.”

 

언무경은 그제야 이런 행동이, 해서가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것임을 알아차리고는 그의 실언을 유도하기 위해, 일부러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순안현의 처리가 전부 그대 한 사람의 공적이란 말인가?”

 

“소관이 어찌 천자의 공덕을 훔치겠습니까? 저는 그저 조정에서 내려주시는 봉록을 먹으며 황제의 명을 실행할 뿐입니다. 대인께서도 아시다시피 관(官)은 민(民)을 근본으로 하지만 순안현은 땅이 작고 척박하여 백성들은 가난하고 이렇다 할 산물도 없습니다. 게다가 여러 차례 왜구가 휩쓸고 지나가면서 이미 피폐할 대로 피폐해져 있지요. 소관은 더, 이상 백성들에게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아 관원의 거복(車服)과 하의(賀儀)를 전부 감면한 것뿐이니 대인께서 넓으신 도량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해서의 흠 잡을 데 없는 대답에 언무경은 더 질책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그대의 말에도 일리가 있구려, 하지만 나는 어명을 받들고 순시를 나온 것이니 그대의 공관에서 하룻밤 신세를 져야 할 것 같은데, 그것마저 지나친 처사라 생각하진 마시오.”

 

“당연하지요. 소관이 이미 다 준비해두었습니다. 하지만 저희 현은 정말로 가난하여 대인께 대접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말을 마치고 나서 해서는 곧바로 언무경 일행을 관아로 안내했다. 더 우스운 일은 심부름꾼도 없이 해서 자신이 심부름꾼 노릇을 하고 아내와 딸을 불러 노복의 신분으로 언무경 일행을 모시게 한 것이다. 차와 밥, 술과 고기 외에는 다른 특별한 물건이 없었으니 선물을 바치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해서의 이런 대응에 언무경은 그의 흠집을 조금도 찾아내지 못하고 속으로 실망과 울분을 삭여야 했다.

 

그의 수행원들도 별 소득이 없자 입에서 투정이 떠나질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언무경 일행은 인사도 없이 일찍 순안현을 떠났다.

 

해서는 절강성 엄주부 순안현의 지현으로 임명된 후부터 지방의 나쁜 풍습과 호문세가(豪門勢家)들의 전횡을 엄하게 다스리기 시작했다. 순안현은 비록 가난하긴 하지만 교통의 요충지로 상인들과 조정 대신, 그리고 각급 관료 대신들의 왕래가 빈번하고 이들을 접대하는 것이 역대 지현들의 가장 크고 힘든 업무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고관이나 귀족들은 이곳에 올 때마다 교통상의 편의를 이유로 며칠씩 묵었고, 그럴 때마다 적지 않은 재물을 챙겼다. 때문에 순안현은 오래전부터 막대한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해서는 부임하자마자 이런 병폐를 과감히 개선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한번은 절강 총독 호종헌(胡宗憲)의 아들 호종선이 순안현을 지나게 되었다. 전형적인 권문세가의 자제인 그는 이곳에서 특별한 접대를 받지 못하자 일부러 말썽을 피우기 시작했다. 역참에 들자마자 대접이 융숭하지 못하고 말이 늦게 제공되었다면서 역참의 관리를 나무에 묶어놓고 호되게 두들겨 팬 것이었다. 당시 주위에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의 부친의 권세가 두려워 아무도 화를 내거나 말리지 못했다.

 

누군가 이 사실을 해서에게 알리자 그는 당장 달려 나와 이 광경을 보았다. 당장 화풀이를 하고 싶었지만 호종선이 조정을 장악하고 있는 재상 엄숭(嚴嵩)과 같은 당파라는 사실 때문에 섣불리 덤벼들지 못했다. 자신이 파직되는 것은 괜찮지만 다른 지방관들이 연대 처벌을 받게 될 것이 두려웠다. 지모가 뛰어난 그는 호종선의 입을 봉하면서 나쁜 풍습을 선도할 수 있는 묘책을 생각해냈다.

 

해서는 모여있는 사람들 틈을 헤치고 곧장 역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호종선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를 호되게 나무랐다.

 

“어디서 온 녀석인데 감히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 게냐?”

 

옆에 서 있던 사람들이 해서에게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며 낮은 목소리로 그가 호종헌의 아들임을 일깨워주었다.

 

“헛소리 마라! 그럴 리가 있나! 이렇게 무뢰한 자가 호대인의 아들일 리가 없지. 호대인께서는 백성들을 사랑하여 정무에 힘쓰시면서 자제들을 엄격하게 교육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런 망나니 같은 놈이 그분의 자제일 리가 없지. 못된 놈 하나가 호대인의 이름을 팔아 소란을 피운 것이 분명하다. 어서 이놈을 묶어 끌고 가라.”

 

해서의 불같은 호령에 옆에 서 있던 차역(差役)들이 하는 수 없이 명령에 따라 호종헌의 아들과 수행원들을 전부 포박하여 구속했다. 해서는 나무에 묶여 있던 역참 관리를 풀어주고 군중 앞에서 호종선이 가지고 온 여러 개의, 상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호대인은 청렴결백한 명관으로서 순시하는 곳마다 지방관들에게 호화스런 접대를 금지했고 뇌물이나 선물 수수는 더욱 금했다. 한데 지금 이렇게 많은, 상자들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보면 백성들을 착취하여 빼앗은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서도 호대인의 아들이라고 떠벌리다니! 당장 상자를 열어 진위를 가리도록 하라.”

 

상자를 열자 과연 백은이 가득 들어있었다. 해서는 대로하여 말했다.

 

“이 나쁜 놈이 정말 겁도 없구나. 감히 총독의 아들을, 사칭하고 사기와 착취를 자행하다니! 이는 호대인의 깨끗한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이니 이 불량배들의 소행을 호대인에게 알려 엄하게 처벌하도록 하라.”

 

말을 마친 해서는 호종선의 변명을 듣지도 않고 당장 끌어내 호되게 매질을 하라고 명하는 한편, 이들이 부정하게 챙긴 은을 전부 국고로 회수했다.

 

이 일이 있고 난 직후 해서는 호종헌에게 편지를 한 통 썼다. 편지에서 그는 호종헌의 아들을, 사칭하고 다니는 자가 백성들을 속여 다량의 뇌물을 받아 챙겼기에 이를 군중 앞에서 철저히 조사하여 법대로 처벌하고자 하니 지시를 바란다고 말했다.

 

호종헌은 편지를 받아보고 나서 난처하기 그지없었다. 해서에게 공개적으로 죄를 물을 수 없게 된 그는 이 사건을 법대로 처리하도록 허락하는 동시에 자기의 아들을, 사칭한 자는 총독부에서 자신이 직접 처리하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해서는 부당한 피해 없이 호종선을 징계하여 돌려보낼 수 있었다.

 

나중에 해서는 호부의 운남 주사를, 맡게 되었다. 당시 운남 지역은 경사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 조정의 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해서는 운남에 부임하던 가정 45년(1566) 2월에 천하를 뒤집는 상소를 올렸다.


당시 명 세종은 20여 년째 정사를 돌보지 않고 북경의 서원에 칩거하면서 불로장생을 위한 영약(靈藥)을 만드는 일에 전념하고 있었다. 해서의 상소는 바로 이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상소의 불행한 결과를 예상하여 미리 자신의 관(棺)을 마련해놓고 일하는 아이들을 전부 내보냈다. 얼마 후 아내마저 내보낸 그는 마침내 「치안소」를 지어 올렸다. 상소문의 언사는 매우 격렬했고 당시의 나쁜 풍습과 함께 황제의 무능을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었다. 상소문이 공개되자 조야가 동시에 ‘천하제일의 소문(訴文)’이라며 경악과 칭송의 반응을 보였다.

 

세종은 상소문을 읽고 대로하여 이를 내던지면서 즉시 해서를 처형할 것을 명령했다. 다행히 대신들이 나서서 말려 큰 화를 면하고 하옥 당하는 것으로 수습되었다. 얼마 후 세종이 사망하자 해서는 즉시 사면되어 관직을 되찾았고, 얼마 후에는 대리승(大理丞)으로 승급했다.

 

나중에 해서는 수보(首輔) 장거정(張居正)에게 배척되었지만, 장거정이 사망하자 조정에서는 다시 그를 경사로 불러 복직시켰다. 이때 해서의 나이 72세의 고령으로 16년간이나 관직을 떠나있다가 우도어사로 임명된 것이다. 그는 병으로 세상을 떠난 1587년까지 여전히 청렴한 자세로 관직을 지켰고, 죽은 뒤에도 남아있는 재산이 없어 주위 사람들의 돈을 추렴하여 장례를 치러줄 정도였다. 상인들과 농민들이 모두 일손을 멈추고 나와 상여를 뒤따랐으며 전국에 곡소리가 가득했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충개(忠介)‘ 라는 시호를 내렸고 민간에서는 ’해청천(海靑天)‘ 이란 별호가 유행했다.

 

해서는 남다른 지혜와 용기를 지닌 인물이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권력에 아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염된 봉건 관료사회에 수용되기가 쉽지 않았다. 고대 중국의 관료사회에는 그만큼 청관(淸官)이 설 자리가 없었다. 그의 말년이 비참하지 않았고, 많은 사람이 그의 죽음을 애도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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