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物論(45) '관우' 자신을 너무 과신했던 명장의 말로

[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典疏通]용맹한 장수의 성격적 결함은 그를 패망하게 했다

이정랑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21/01/20 [01:25]

人物論(45) '관우' 자신을 너무 과신했던 명장의 말로

[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典疏通]용맹한 장수의 성격적 결함은 그를 패망하게 했다

이정랑 칼럼니스트 | 입력 : 2021/01/20 [01:25]

 

오만함과 고집스러움으로는 큰일을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중국 속담 중에 “부주의로 형주를 잃었다不意失荊州”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삼국시대 관우(關羽)가 형주를 잃고 맥성에서 피살당한 사건에서 유래된 말이다. 관우가 실패한 것은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지나치게 마음을 놓았기 때문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 관우는 부주의 때문에 형주를 잃은 것이 아니었다. 그가 맥성으로 갔던 것은 지나치게 고집이 세고 자신을 과신하는 성격 때문이었다.

 

그의 이런 성격이 후세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의리 있는 장수라는 일반적인 평가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건안 22년(217), 노숙이 세상을 떠나자 손권은 좌호군과 호위장군 여몽(呂蒙)을 보내 육구를 지키게 했다.

 

관우가 점령한 남안과 남군 등지는 동오의 국경과 인접해 있었다. 여몽은 관우가 하류를 점령할 것임을 알아챈 데다가 그의 땅을 먹어 치울 생각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겉으로는 의도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여몽은 오래전부터 형주를 수복하려 했지만 적절한 기회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여몽은 노숙을 대신하여 육구를 접수한 후에도 여전히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고, 심지어 손권과 상의하여 손권의 아들로 하여 관우의 딸에게 청혼하게 함으로써 양국 간의 깊은 우의를 과시하기도 했다.


여몽이 손권에게 말했다.

 

“지금 관우가 감히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공께서 영명하시고 우리 같은 장수들이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처럼 세력이 강대해졌을 때 관우의 땅을 취하지 않는다면 나중에는 아무리 강한 무력으로도 형주를 수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에 대해 손권은 서주를 먼저 점령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지만, 여몽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조조는 지금 멀리 황하 이북에 있으면서 최근에야 원씨(袁氏) 형제들의 세력을 제거한 상태이기 때문에 강동을 돌볼 틈이 없습니다. 서주 지구의 수비부대는 그리 걱정할 바가 못 됩니다. 지금 우리가 쳐들어가면 틀림없이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지역이 육로의 요충지란 사실을 반드시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공께서 오늘 서주를 취하시면 내일 당장 조조가 빼앗으러 달려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8만의 병력을 다 동원한다고 하더라도 지켜내기 어렵지요. 차라리 먼저 관우의 땅을 빼앗으면 장강 지역 전체를 통제할 수 있기에 우리의 세력은 누구도 당해내지 못할 정도로 막강해질 것입니다.”

 

손권은 여몽의 그럴듯한 설명에 형주를 수복하려는 욕심이 더욱 강해졌다. 건안 24년(219), 관우는 조조가 점령하고 있던 번성을 공격하면서 일부 정예병력을 남겨 공안과 남군을 지키게 했다. 여몽은 이런 사실을 알아내고 손권에게 주상을 올렸다.

 

“관우는 번성을 토벌하면서 상당한 정예병력을 진영에 남겨두었습니다. 우리의 습격을 두려워한 까닭이지요. 전 항상 병을 달고 사는 몸이니 공께선 제 병을 구실삼아 관병들로 하여 절 호위하여 건업으로 돌아가게 하십시오. 관우가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곧장 방비를 풀고 공안과 남군의 병력을 빼내 번성 공격에 동원할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쳐들어 가는 것이지요. 주야로 행군하여 장강을 거쳐 상류로 가서 관우의 빈 성을 습격하는 겁니다. 이렇게 한다면 관우를 사로잡는 동시에 남군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손권은 여몽의 책략에 동의했다. 이에 여몽은 자신이 중병에 걸렸다는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고 손권은 여몽을 건업으로 돌려보내라는 격서(檄書)를 공개적으로 하달했다. 관우는 여몽이 육구를 떠난다는 것이 계략인 줄 모르고 남군의 병력을 조금씩 빼내 번성 공격을 지원하게 했다. 손권은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고 즉시 여몽에게 명령을 내려 책략을 실행에 옮기게 했다.

 

여몽은 명성은 별로 없지만 중임을 떠맡기에, 충분한 능력이 있는 육손(陸遜)을 추천하여 자신의 직무를 대신하게 했다. 육손은 임무를 맡자마자 대단히 우호적이고 겸손한 내용의 편지를 한 통 써서 관우에게 보냈다. 관우는 여몽이 중병으로 한창을 떠난 데다가 육손의 편지를 받게 되자 완전히 경계심을 풀고 남군 등지에 남겨두었던 병력을 전부 번성으로 투입했다.

 

이 소식을 들은 손권은 여몽에게 즉시 정예 병사를 이끌고 순양으로 가서 병사들을 배 안에 매복시키고 노젓는 사람들을 전부 상인으로 변장시켜 쉬지 않고 밤낮으로 남군을 향해 배를 몰게 했다. 여몽은 손권의 명령에 따라 장강 하류로 내려가면서 강 연안에 관우가 배치한 초소를 전부 제거하고 무사히 남군에 당도했다.

 

당시 남군태수 미방(糜芳)은 강릉을 지키고 있었고 장군 부사인(傅士仁)은 공안을 지키고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관우가 자신들을 무시해온 데 대해 줄곧 불만을, 갖고 있었다. 더구나 오래전부터 몰래 손권과 내통하고 있던 터라 여몽의 부대가 도착하자마자 두 사람은 모두 병력을 이끌고 여몽에게 투항했다.

 

여몽은 남군 등의 성지를 점령한 다음 모든 재산을 관우와 그 병사들의 가족들에게 나눠주면서 이들을 위로했다. 뿐만, 아니라 여몽의 군대는 군율이 매우 엄격했다. 여몽과 동향인 사병 하나가 군용 갑옷을 가리기 위해 민가의 삿갓을 빼앗는 사소한 약탈 행위가 발생하자 여몽은 눈물을 머금고 이 사병을 참수했고, 이에 병사들이 놀라 백성들에게서 쌀 한 톨조차 빼앗지 않았다. 덕분에 남군의 치안은 완벽했다. 또 여몽은 사람들을 보내 그 지역의 노인들을 도와주고 그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아내 지원해주었으며, 환자들에게 약을 나눠주고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에게 양식과 의복을 공급해주었다. 아울러 관부(官府)에 보관된 재산에 대해서는 전혀 손을 대지 않고 손권이 와서 처리하기를 기다렸다.

 

이때 관우는 남군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러 차례 사자를 보내 여몽과의 타협을 시도했다. 여몽은 매번 사자들을 후하게 대접하면서 이들에게 성안을 둘러보게 하고 병사들의 집안을 구경시켜주었다.

 

관우는 번성 토벌에서도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형주를 빼앗겼다는 소식에 황급히 회군했다. 여몽은 사람을 보내 관우의 병사들에게 그들의 가족들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알리는 한편, 관우 장병들의 가족들에게 직접 편지를 쓰게 하여 이것이 사실임을 알리게 했다. 이리하여 관우의 병사들은 비록 강릉이 점령당했다고는 하나 두려워하지 않았고 더, 이상 관우를 위해 오군(吳軍)과 목숨을 걸고 싸우려 하지도 않았다.

 

관우는 대세가 이미 기울어 자신이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였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고개를 숙이고 맥성으로 귀순하여 서쪽의 장향으로 갔고, 그의 수하에 있던 병사들은 전부 손권에게 투항했다. 관우가 맥성으로 페퇴하려 하자 손권은 즉시 병력을 보내 이를 저지하고 관우와 그의 아들을 사로잡았다. 이로써 형주는 마침내 손권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었다.

 

관우의 성격에는 자만심과 고집이라는 치명적 결점이 있었다. 그는 한 번도 누군가에게 굴복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전사를 처리하는 데도 조심성과 경계심이 부족했다. 소설 『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에는 관우의 이러한 성격적 결함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유비가 칭제한 후에 오호대장을 봉했을 때, 그는 황충(黃忠)도 그 안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유비의 결의 형제도 아니고 마초(馬超) 같은 명문 세가 출신도 아닌 황충을 자신과 똑같은 오호대장의 대열에 넣는 것은 자신에 대한 모욕이라고 항변했다. 다행히 제갈량이 이런 사태를 예상하고 그를 다독거려줌으로써 황충이 오호 대장에서 퇴출 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동오의 손권이 그와 결친하기를 바랐을 때도 이것이 형주를 지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찌 호랑이의 딸을 개의 자식에게 출가시킬 수 있느냐며 오만한 태도로 이를 거절했다.

 

하지만 관우가 의인이었던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의 이러한 장점이 모든 성격적 결함을 가려주었다. 하지만 진정한 군사 전문가라면 모든 문제와 상황응 냉철하게 통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전제할 때 관우를 평가한다면 적지 않은 결점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관우의 실패는 우발적인 원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예고되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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