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릉물향(高陵勿向)' 높은 언덕은 올려다보지 않는다

이정랑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21/02/23 [01:49]

'고릉물향(高陵勿向)' 높은 언덕은 올려다보지 않는다

이정랑 칼럼니스트 | 입력 : 2021/02/23 [01:49]

 

 

‘손자병법’ ‘군쟁편’에서 말하는 ‘용병의 8원칙’의 하나다. ‘고릉물향’에서 ‘고릉(高陵)’은 높고 큰 흙산을 가리킨다. ‘향(向)’은 마주 대한다는 뜻이다. 요컨대 적이 높은 산을 차지하고 진지를 구축해놓았다면, 무리하게 올려다보면서 공격하지 말라는 것이다.

 

제갈량은 ‘편의십육책(便宜十六策)’ ‘치군(治軍)’ 제9에서 “산과 언덕에서의 전투는 높은 곳을 올려다보고 치러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는 구체적인 전술적 지휘의 계략이다. 손자는 8가지 용병법을 제기했는데, 이는 당시 전쟁의 특징과 무기의 특징 등을 근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군사 활동은 언제 어디서든지 변화하는 것이므로, 이 8가지 상황으로 전쟁을 개괄하기란 어림도 없다. 관건은 구체적인 상황에 근거하여 원칙을 활용하는 데 있다.

 

손자가 활약하던 시대의 작전은 주로 전차와 짧은 병기로 이루어졌다. ‘높은 고지’를 차지한 적을 올려다보고 공격한다면 대개는 성공하기 어렵다. 설사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희생이 너무 커서 득보다는 실이 많다.

 

손자는 ‘행군편(行軍篇)’에서 부대가 산지를 통과할 때는 계곡을 따라 행군해야 하는데, 시계가 트이고 위치가 높은 곳을 차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적이 높은 곳에 있으면서 싸움을 걸어오면 올라가서는 안 된다’는 ‘전륭물등(戰隆勿登)’의 계략도 바로 이런 이치에서 나온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면 공격을 피하고 적의 취약한 부분을 선택, 공격해야 한다.

 

전국시대 말기에 조나라는 조사(趙奢)로 하여 진(秦)의 공격을 받고, 있는 한(韓)을 구원하게 했는데, 조사는 진군을 대파하고 한에 대한 포위를 풀었다. 조사가 성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군사 전문가 허력(許歷)의 계략에 따라 먼저 북산(北山)의 ‘높은 고지’를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진군이 이르렀을 때는 이미 늦었다. 진군은 올려다보며 공격을 가할 수밖에 없어 고지를 빼앗지 못했다. 조사는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공격하여 진군을 대파했다. 이 전례는 냉 병기로 작전하던 시대적 조건에서, 높은 곳을 차지하고 있는 적을 올려다보고 공격하는 것이, 쉽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현대 전쟁은 무기를 비롯한 전쟁 장비가 손자가 살던 시대와는 확연히 다르다. 원거리 화기와 공중 무기의 출현으로 이 전술 원칙은 이미 그 보편적 의의를 잃어버렸다. 이제는 ‘고릉’도 올려다보고 공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냉 병기 시대에도 ‘고릉물향’이 절대적으로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 시대에도 ‘고릉’을 차지하는 것이 전쟁의 전체 국면을 좌지우지하거나 궁극적으로 아군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라면 그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탈취해야 했다.

 

어떤 계략이든 모두 일정한 시대적 한계에서 나오게 마련이다. 따라서 오늘날 상황에서 이 계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것의 실질성을 인식한 기초위에서, 때‧장소‧적의 변화 등에 따라 발전시키고 역동적으로 운용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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