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수인 王守仁' 재상과 명장의 능력을 겸비한 인재

[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典疏通]人物論(53) 조정에서는 재상, 전장에서는 맹장

이정랑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21/03/18 [20:50]

'왕수인 王守仁' 재상과 명장의 능력을 겸비한 인재

[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典疏通]人物論(53) 조정에서는 재상, 전장에서는 맹장

이정랑 칼럼니스트 | 입력 : 2021/03/18 [20:50]

 

 

모든 서생이 다 무능하고 계책이 없지는 않았다.

 

다양한 장군의 품격 가운데 최고의 경지는 역시 유장(儒將-선비 출신의 장수)이라 하겠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문무를 겸비한 유장에게는 두 가지 장점이 상호 보완적 기능을 수행하여 그만큼 인격적 매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한 유장이 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중국 역사에는 스스로 유장임을 표방한 인물이 무수히 많았지만 진정한 유장이라 할 만한 인물은 극히 드물다. 그 이유는 장수로서의, 자질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학자로서의 인격이 불충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유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명대의 대학자였던 왕수인(王守仁-1472~1528)이 이를 증명한다. 그는 학자로서 자질과 능력이 충분했고 중국 역사상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유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서 문화의 거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또 그는 수많은 작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무장으로서의 능력을 보였고 황실에 대한 반란을 평정하기도 했다.

 

명 무종(武宗) 정덕(正德) 14년(1519), 강서에서 기병하여 반란을 일으킨 영왕(寧王) 주신호(朱宸濠)가 각지의 중진을 함락시키고, 불과 사흘 만에 파죽지세로 구강 등지를 장악했다. 이런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과 민간이 큰 혼란에 빠졌지만, 군신들은 속수무책이었다.

 

명조에는 이전에도 이런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었다. 연왕(燕王) 주체(朱棣)가 자신의 봉지인 북경에서 모반을 일으켜 수년간에 걸친 정전 끝에 혜제(惠帝-명나라의 2대 황제인 건문제(建文帝))의 황위를 빼앗았던, 것이다. 때문에, 조정은 큰 불안에 휩싸여 불운한 역사가 반복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조정이 이처럼 비통한 분위기에 젖어 있을 때 병부상서 왕경(王琼)은 침착하게 반란을 진압하고 큰 공을 세울만한 유장을 물색했다. 이때 그의 눈에 든 사람이 바로 당시의 유명한 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왕수인이다.

 

왕수인은 일찍부터 주신호의 모반을 예견하고 이를 미리 방비해둔 바가 있었다. 한번은 그가 복주에서 주신호를 배알, 연회에 동석했을 때였다. 한때 시랑을 지냈던 이사실(李士實)도 주신호의 문객으로 자리를 함께하게 되었다. 시정에 관한 담론이 오가면서 이사실이 탄식을 내뱉었다.

 

“세상이 이처럼 어지러운데 안타깝게도 탕무(湯武) 같은 인물이 없구려!”

 

당시의 상황에서 이 말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첫째는 황제에 대한 모반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고, 둘째는 왕수인이 심학(心學-중국의 정주학(程朱學)과 대립 되는 심즉이설(心卽理說)의 학문체계, 넓은 뜻으로는 마음을 수양하는 학문으로 유교 전체를 말하기도 하나, 일반적으로 송나라 때의 육상산(陸象山), 명나라 때의 왕수인(王守仁)이 제창한 학문을 일컫는다.)을 창시하여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암암리에 다른 사람이 성인이 되도록 돕는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총명하고 눈치 빠른 왕수인은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말을 받았다.

 

“탕무가 살아있다 하더라도 이려(伊呂)가 보좌해 주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오.”

 

주신호가 자신 있게 말했다.

 

“탕무가 있다면 자연히 이려도 있게, 마련인데 걱정할 일이 무엇이란 말이오?”

 

이사실을 이려에 비유한 주신호의 말에 왕수인이 응수했다.

 

“이려가 있다면 틀림없이 이제(夷齊)도 있을 것이오.”

 

이제는 옛날 은나라의 백이와 숙제를 지칭했다. 주 무왕이 은의 주왕을 멸해 주나라 천하가 되자 두 형제는 주나라의 양식을 먹지 않겠다며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결국, 굶어 죽고 말았다. 역사에서는 백이 숙제 형제를 절개 있는 현인으로 칭송하고 있다.

 

이때 이후로 왕수인의 심지를 알게 된 주신호는 항상 그를 경계하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그를 해치려고 했고, 왕수인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주신호의 일거일동을 철저하게 감시했다.

 

6월 9일, 감주를 출발한 왕수인이 15일에 풍성에 도착하자 풍성 지현은 주신호가 모반을 일으키는 동시에 왕수인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임기응변에 능한 왕수인은 즉시 복장을 바꿔 임강으로 잠입했다. 임강 지부는 왕수인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신발도 신지 않은 채 황급히 달려 나와 영접하고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성지를 지킬 계략을 제시해 달라고 간청했다. 왕수인이 대덕유(戴德儒)에게 말했다.

 

“임강은 장강(長江-양자강을 달리 이르는 말) 유역에 있어 남창과 인접한 데다가 교통의 요충지인 만큼 길안으로 가는 것이 좋겠소.”

 

대덕유는 이에 찬성하면서 반군을 막아낼 계책을 물었다. 왕수인은 적의 위치와 형세에 대해 세밀하고 체계적인 분석을 마친 후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주신호의 용병에는 상중하 세 가지 계략이 있소. 그가 곧장 경사로 쳐들어간다면 나라가 위급한 지경에 처해 예상치 못한 후환을 조성하게 될 텐데 이것이 상책일 것이오. 아니면 먼저 남경을 점령하여 장기전 태세를 갖출 수도 있는데, 이것도 큰 피해가 우려되는 상황이오. 이는 상책이 될 수는 없지만, 중책이라 할 만하오. 하지만 그가 남경을 사수하면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이는 하책이 될 것이오. 그때 가서 관군을 한대로 집결시켜 사방에서 한꺼번에 공격한다면 그는 항아리 속의 자라가 되어 손쉽게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대인은 이런 구체적인 상황에 맞춰 다양하게 조치를 하도록 하시오.”

 

그러고 나서 왕수인은 비밀리에 고깃배를 한 척 구해 직접 길안으로 향했다. 얼마 후 반군의 추격을 받게 되자 그는 평민 복장으로 갈아입고 부하에게 자신의 관복을 입고 타고 있던 배에 남아 있게 했다. 주신호의 부하들은 이 배를 뒤쫓아 붙잡았으나 왕수인이 이미 멀리 도망쳤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되돌아갔다. 도중에 주신호가 공격하여 성지를 함락시킬 것을 우려한 왕수인은 밀정을 보내 조정의 밀지를 가장하여 양평과 호양의 어사와 남경과 북경의 병부는 즉시 장수들을 출동시켜 비밀리에 요충지에 매복하고 있다가 주신호의 대군이 몰려오면 이들을 기습공격하라는 명령을 전달했다.

 

그는 이런 조치로도 충분치 못하다고 판단하고 우령(優伶) 몇 명을 고용하여 이런 명령이 담긴 서한을 옷섶에 지니고 다니게 했다. 우령들이 출발할 때쯤 그는 또 영왕 태사의 가족들을 사로잡아 그들을 배에 태워 일부러 이런 명령을 알게 했다. 그러고는 크게 화를 내며 이들을 배에서 끌어내려 목을 베라고 호통쳤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들이 몰래 도망쳐 주신호에게 거짓 정보를 전달하게 하려는 술책이었다.

 

이런 소식을 들은 주신호는 우령들을 붙잡아 그들의 옷 속에서 서찰을 발견하고는 정말로 조정에서 병력을 움직이기 시작한 것으로 오판하고 출병을 망설였다. 한편 무사히 길안에 도착한 왕수인은 길안 지부 오문정(伍文定) 등과 함께 주신호에 대한 방어 전략을 상의했다.

 

“적병이 장강을 타고 동쪽으로 이동한다면 남경을 지켜내기 어려울 것이오. 하지만 내가 이미 그들의 동행을 저지할 수 있는 조치를 해놓았소. 열흘 후에 여러 지역의 군마가 집결하면 주신호와 결전을 벌여도 문제가 없을 것이오. 옛 성현들께서도 일이 닥쳤을 때는 두려움을 갖고 진지하게 책략을 준비하라 하셨소. 이제 곧 군사를 움직여야 할 터이니 먼저 군량과 마초를 충분히 확보하고 병기와 배를 넉넉하게 갖춰 결전에 대비하도록 하시오.”

 

그리하여 왕수인은 군마와 군량, 마초를 준비하는 동시에 사방에 방을 붙여 16만 대군이 남창 부근에 집결할 예정이라 대량의 군량이 필요하니 제때 군량을 내도록 하되 이를 어기는 사람은 참수하겠다는 포고를 내렸다.

 

주신호가 포고문을 보고는 진위를 가리지 못해 밀정을 보내 알아보게 했으나 너무나 치밀한 계략에 밀정도 이를 사실로 알고 그대로 보고했다. 결국, 주신호는 목을 감춘 자라처럼 남창 성안에 틀어박혀 감히 남경으로 진군하지 못했다. 왕수인도 여전히 성을 지키면서 출병하지 않자 오문정은 이를 이상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었다.

 

”용병의 도리에 따르자면 적을 기습 공격하는 것은 부득이한 경우에 하는 일이오. 지금 반군이 성안에서 꼼짝하지 않은 채 방비에 전념하고 있으니 공격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오. 내가 공격을 미루면서 일부러 수비가 허술한 척하면 주신호가 먼저 참지 못하고 공격해올 터이니 그때 가서 그가 차지했던 성을 수복하고 그의 본거지를 제거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오. 그가 다시 성을 공격하기 위해 병력을 돌릴 때 진로를 차단하고 공격하는 것이 거점을 포위하여 공격하는 것보다 훨씬 수월할 것이오.“

 

오문정은 왕수인의 전략에 감탄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주신호는 남창을 사수한 지 열흘쯤 지나도 관군의 공세가 시작되지 않자 정찰병을 보내 상황을 면밀하게 파악한 결과 자신이 왕수인의 계략에 말려들었음을 깨달았다. 후회막급이었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그는 서둘러 6만의 병사와 군마를 모아 10만 대군을 자칭하면서 파양호를 출발하여 남경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남창에는 최소한의 병력만 남아 지키게 했다. 그러나 주신호는 안경에서 관군의 저항에 부딪혀 며칠 동안 성을 포위하여 적극적인 공격을 펼쳤지만, 병력의 손실만 가중될 뿐 전세가 나아지지 않고 진퇴양난의 함정에 빠져버렸다.

 

그 사이에 왕수인은 어렵지 않게 군대를 이동시킬 수 있었다. 이제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왕수인은 오문정 등 길안에서 온 병력과 포고에 따라 각 지역에 집결한 8만의 병력을 이끌고 7월 중순에 팽성에 도착했다. 이때 장수하나가 그럴듯한 계책을 제시했다.

 

”주신호는 열흘 동안의 치밀한 계략 끝에 출병한 만큼 남창성의 방비 또한 철저하여 일시에 함락시키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 안경을 공격하고 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털어져 있을 터이니 대군을 파견하여 안경의 병력과 합세하여 양면에서 협공하면 대승을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남창의 병력은 공격하지 않아도 저절로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이는 대단히 일리 있는 허허실실 책략으로 병가의 도리에 합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수인의 생각은 달랐다.

 

”아니요.! 아군이 남창을 가로질러 내려가 장강에서 적군과 대치한다면 안경의 병력은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을지 몰라도 장강으로 와서 우리를 지원하지는 못할 것이오. 게다가 남창의 병력이 우리의 뒤를 공격하게 되면 보급로가 끊어지고 남창과 구강의 적병이 합세한다면 우리는 앞뒤로 적을 상대해야 하기에 훨씬 불리한 상황으로 몰릴 수 있소. 차라리 남창을 먼저 공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주선호의 정예 병력은 전부 안경에 있기 때문에 남창의 수비는 허술할 수밖에 없소. 아군의 사기가 한참 올라 있는 이때에 남창을 치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오. 주선호가 아군의 남창 공격 사실을 알게 되면 틀림없이 병력을 돌려 지원하러 오겠지만 그때는 이미 세력이 크게 약해져 있을 것이고, 일단 남창을 함락시키면 적군의 기세는 크게 꺾여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질 것이오.“ 

 

이는 아군에 대한 지원과 적에 대한 공격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최고의 전략으로써 병법의 극치라 할 만했다. 그리하여 왕수인은 부대 전체를 몇 개의 지대로 나누어 남창의 각 성문을 공격했다. 19일에 출병한 그는 다음날 날이 밝기 전에 지정된 장소에 도착하기로 약속하고 명령을 내렸다.

 

”북을 한 번 울리면 성문에 접근하고 두 번 울리면 성에 오르기 시작한다. 북을 세 번 울릴 때까지 성에 오르지 못한 자는 무조건 참수하고 네 번 울렸을 때 성안에 들어가지 못한 자가 있으면 그 부대장까지 참수한다.“

 

아울러 성인의 백성들에게도 전부 문을 닫아걸고 절대로 반군에 협조하지 말며 두려워서 숨겨나 도망가지 말라는 내용의 포고문을 만들어 배포했다.

 

마침내 사다리와 밧줄 등 성을 오르기 위한 도구가 갖춰지고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수비하는 적군들의 저항이 있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도망치거나 숨기에 급급했고, 미처 성문을 닫아걸기도 전에 왕수인의 군대가 밀고 들어가 손쉽게 남창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 이는 번개처럼 빠르고 신속한 작전으로 적의 기선을 제압한 결과였다. 

 

이어서 왕수인은 성안의 백성들을 위무하고 군기를 엄격히 세워 함부로 불을 지르거나 노략질을 하는 사람은 군법에 따라 다스렸다. 동시에 반군의 주요 장수 10여 명을 생포하는 대신 본의 아니게 반군에 협조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풀어줌으로써 빠른, 시간에 성안의 안정을 되찾아주었다.

 

이때 주신호는 전력을 다해 안경성을 공격하고 있었다. 하루 이틀 사이에 성을 점령할 생각이었던 그는 남창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고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사실 등은 주신호에게 곧장 병력을 돌려 남창의 군사를 지원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안창을 포기하고 곧장 남경으로 가서 황위를 찬탈하여 천하를 호령하기만 하면 강서는 저절로 굴복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이는 당시에 대단히 정확하고 결단력 있는 전략이었고, 일단 성공하기만 하면 정국의 미래는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접어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생각이 모자란 주신호는 이를 거부하고 고집을 부리면서 안창을 포기하고 남창으로 달려갔다. 왕수인의 계략에 정확하게 걸려든 것이었다. 

 

22일, 반군이 남창을 지원하러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왕수인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대책을 상의했다. 장수 하나가 나서서 자신의 계략을 밝혔다.

 

”반군의 세력이 강대한 데다가 우리 지원군은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으니 이들을 막아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사방의 보루를 견고히 하여 성을 사수하면서 지원군을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보통 군사 전문가라면 이렇게 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전략이었겠지만 왕수인의 생각은 달랐다.

 

”주신호의 병력이 강하긴 하지만 가는 곳마다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기 때문에 병사들도 억지로 복종하고 있는 형편이오. 게다가 지금 그들은 진퇴가 자유롭지 못하고 한낱 안경성조차도 함락시키지 못한 데다가 근거지마저 잃은 터라 병사들의 마음이 이미 상갓집 개처럼 흩어지기 시작했을 것이오. 아군은 병력이 많진 않지만 전부 정예병이라 할 수 있고 사기도 왕성하니 일당백으로 싸움에 임해 승기를 잡기만 한다면 어렵지 않게 적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오.“

 

마침 이때 무주 지부 진괴(陳槐)가 병력을 이끌고 도착했다. 다음날 주신호의 선봉대가 초사에 당도하자 왕수인은 오문정이 정면에서 공격하고 여은긴(余恩緊)이 후면에서 공격하며 서연(徐璉)과 대덕유가 좌우 양쪽에서 협공하도록 진영을 배치했다. 배치를 마친 왕수인은 남창성안에 차분히 앉아서 좋은 소식을 기다렸다.

 

24일, 반군은 대단한 기세로 황가도를 향해 밀려왔다. 오문정은 몇 번 싸우다가 지는 척하면서 갑자기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에 적병은 전력을 다해 진군하면서 점차 대오가 흐트러져 상호 대응이 어려워졌다. 이때 왕수인의 군대가 적진을 가르며 달려들어 반군의 대오를 완전히 흐트러뜨리자 반군은 방향을 잃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오문정이 퇴각하는 적병을 추격하자 서연과 대덕유의 협공이 시작됐다. 오문정 등은 승기를 놓치지 않고 10여 리까지 적을 쫓아가 2천여 명을 생포하거나 사살했고 물에 빠져 죽은 적병도 수만에 달했다. 반군은 사기가 크게 떨어진 채 퇴각하여 팔자뇌를 사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왕수인은 다시 장수들을 불러모아 당시의 형세를 치밀하게 분석하고 나서 말했다.

 

”구강과 남강을 수복하지 않으면 도로가 막히게 되고 호광(湖廣)의 지원군이 도착하기도 어려울 것이오.“

 

그리하여 그는 병력을 나눠 구강과 남강으로 급파했다. 주선호도 이러한 형세를 간파하고 구강과 남강에 병력을 보내 왕수인의 관군과 일전을 벌이기로 작정했다. 이틀 동안의 격전을 경험으로 왕수인은 반군을 완전히 섬멸할 수 있는 치밀한 계획을 마련했다. 주신호가 배를 연결시켜 진을 치는 것을 보고는 화공(火攻)용 병기를 총동원하여 좌우 양쪽에서 협공하는 동시에 병사들을 사방에 매복시켜 불로 공격하면서 진격해 들어간다는 전략을 짠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주신호는 반군의 여러 대장을 접견하면서 작전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자들은 무조건 참수하겠다고 위협함으로써 장수들의 불만을 샀고 군대의 심리도 이반 되기 시작했다. 이때 관군의 전면적인 공세가 시작되면서 사방에서 불길이 솟아오르고 곳곳에서 비명이 천지를 요동쳤다. 주신호가 타고 있던 배도 불길에 휩싸였다. 반군은 삽시간에 무너졌고 무수한 반군 병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쳤다. 주신호는 이미 대세가 기울어 자신의 실패를 되돌릴 수 없음을 깨닫고 울면서 여러 빈비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빈비들은 대부분 물에 몸을 던졌고 주신호의 수하에 있던 장수들은 생포되었으며 사상자가 수만 명에 달했다. 이때 구강과 남강이 수복되었다는 또 다른 첩보가 날아왔다. 

 

중국 군사 사에서는 왕수인을 뛰어난 장수로 평가하지는 않지만, 그가 훌륭한 군사 전략가였음에는 이견이 없다. 그가 지휘한 반군 진압 작전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가 가진 군사 전문가로서 자질과 정치가로서의 넉넉한 도량을 알 수 있다.

 

반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그는 이미 주신호의 불순한 기도를 매우 날카롭게 관찰하고 있었고, 줄곧 조정과 일정한 연계를 유지하면서 조직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사태의 발생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가 반란을 진압하는 데 현실적 조건을 제공해주었다. 이와 반대로 주신호는 처세술에 능하지 못했고 너무 일찍 자신의 의도를 드러냈으며 인재와 물자에 대한 준비가 부족했다.

 

또 구체적인 전술 운용에 있어서 왕수인은 뛰어난 군사 전문가로서의 풍모를 과시했다. 그는 매사에 실제 상황을 출발점으로 삼음으로써 이론만 중시하고 실제를 무시하는 유생들의 일반적인 단점을 극복했고 병법의 운용에, 있어서도 적이 완전히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도록 유도하는 지략을 발휘했다.

 

이는 전체 중국 군사 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이다. 이처럼 왕수인이 사람들을 감복케 하는 것은 그가 문화의 위인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군사 전문가로서의 경험과 지략을 겸비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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