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진과 장의' 지모와 언변으로 외교를 장악하다

[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典疏通] 人物論(80) 合從과 連橫의 유세를 펼치다

이정랑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21/10/20 [03:48]

'소진과 장의' 지모와 언변으로 외교를 장악하다

[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典疏通] 人物論(80) 合從과 連橫의 유세를 펼치다

이정랑 칼럼니스트 | 입력 : 2021/10/20 [03:48]

 

춘추전국시대의 종횡가(縱橫家)는 학파의 명칭이 아니라 독특한 모사들의 무리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종횡가는 매우 중요하고 독특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들에겐 그들 나름으로 학설이 있고, 심지어 다른 학파들에 비해 뛰어난 체계와 면모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관건은 종횡가의 학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종횡가의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효용에 있다. ‘한번 노하면 모든, 제후들이 두려움에 떨지만 일단 안거하면 천하가 조용해진다’는 말이 종횡가의 현실적 효용을 잘 말해준다. 종횡가의 적극적인 역사적 역할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한 바 있다. 

 

예컨대 『전국책』에서는 소진(蘇秦)이 주장한 합종(合從-전국시대에 소진이 주장한, 6국이 동맹하여 서쪽의 진(秦)나라에 대항해야 한다는 일종의 공수 동맹) 운동에 대해 “양곡을 들이지 않고, 병사들을 괴롭히지도 않으며, 전사 하나 죽이지 않고, 화살 하나 낭비하지 않으면서 제후들이 서로 형제처럼 친해지게 만들었다.”라고 극찬했다.

 

다른 학파들과 비교해볼 때, 종횡가의 현실적 실천에서는 세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고정된 군주가 없고 둘째, 고정된 정치적 주장이 없으며 셋째, 일정한 가치 기준이 없고 세력과 이익 추구 외에 어떠한 도덕적 속박도 없는 것이다.

 

소진과 장의(張儀)는 당시는 물론 중국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종횡가였다. 전국시대 후기의 역사를 거시적으로 바라보면 당시의 국제관계가 이 두 사람의 지모와 언변에 의해 좌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소진의 ‘합종’으로, 나중에는 장의의 ‘연횡’으로 전국 칠웅을 마치 장기판의 장기알처럼 마음대로 가지고 놀았던, 것이다. 이는 세계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수한 현상이었다. 아마도 고대 인류 역사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외교가는 소진과 장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합종과 연횡 자체가 정의로운 것인지 아닌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합종과 연횡을 제시했던 두 사람에게서는 정의감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동시대의 장자처럼 고상하지도 못했고, 맹자처럼 이상을 위해 분투하지도 않았다. 그들의 모든 신념은 돈과 권력으로 집중되었고 다른 숭고한 이상이나 고귀한 품성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온갖 속임수의 교활함, 잔인함과 뻔뻔스러움으로 무장하고 권력을 최고의 가치 기준으로 삼았다. 남북으로 합종 하거나 동서로 연횡 하면서 그것이 정의이든 불의이든,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고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든 그들은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권력과 부귀영화였다. 이것이 바로 종횡가가 가지고 있는 지모의 문화적 특징이다.

 

종횡가의 지모는 춘추전국시대라는 특정한 국제정세의 산물로서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가 빠른 속도로 쇠퇴했다. 한대에 제국이 통일되자 종횡가의 지모는 더, 이상 효용의 가치가 없어졌고, 각조대마다 어느 정도 종횡가가 설 여지가 있긴 했지만, 더 발전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종횡가의 문화적 특성은 ‘할머니가 있으면 어머니도 있기 마련’이라는 무원칙적 공리의식과 유창한 언변 등으로, 이는 중국인의 민족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현대 중국의 망명 시인 베이다오(北島)는 자신의 시에서 “비겁함은 비겁한 자들의 통행증이요. 고상함은 고상한 사람들의 묘비명이다.”라고 하여 인간성과 비극적인 역사의 간극(間隙)을 의미심장하게 표현했지만, 역사 또한 이러한 비극의 의식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중국인의 전통적인 이상은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라 관료가 되는 것이었다. 관료가 되어야 권력이, 주어지고 권력이 있어야 재물이 따르기 때문이다. 부, 귀 영, 화 이 네 가지는 관료가 누리는 가장 큰 혜택이다. 일단 관료가 되면 물질적인 만족뿐 아니라 뭇 사람들의 존경과 부러움을 사면서 허영심과 명예욕도 함께 만족시킬 수 있다. 게다가 도덕적으로도 사회적 인정을 받을 수 있고 가문을 빛낼 수 있다.

 

그러나 영웅들은 그렇지 못했다. 중국 역사에서 영웅들은 대부분 멋진 최후를 맞지 못했다. 부와 귀가 따르지 않는 것은 물론 영과 화마저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영웅이 되기보다는 관료가 되기를 원했다. 

 

반면에 관료가 되기만 하면 그 과정에서의 수단이 어떻든, 목적이 무엇이었든 관계없이 성공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여론도 그의 편에 서게 된다. 중국인들은 항상 ‘성패로 영웅을 논하지 말라’고 외치면서도 현실 속에서는 이를 실천하지 못했다. 때문에, 중국인들은 어떤 이상이나 원칙을 위해 관료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관료가 되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다. 전국시대에 남북으로 합종, 진에 대항할 것을 주장한 소진(蘇秦)과 동서로 연횡, 스스로 지킬 것을 주장했던 장의(張儀)가 바로 이 분야의 대표적인 인물로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관료가 되는 데 전력을 다하였다.

 

소진의 집안은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소진은 의식주가 풍족한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존경과 부러움을 한 몸에 차지하는 남다른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의 정세에 따라 갖가지 권모술수를 연구하고 각, 제후국들 사이의 관계를 면밀하게 분석하여 진왕에게 유세함으로써 높은 직위를 얻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담비 가죽으로 만든 화려하고 값비싼 옷을 입고 황금 백 근을 준비해 진나라로 가서 혜왕에게 편지를 올렸다.

 

“대왕의 나라는 서쪽의 파, 촉, 한중에서 풍부한 물산을 제공하고 있고, 북쪽에는 호와 대 지역에서 훌륭한 말을 생산하고 있으며, 남쪽에는 무산과 검중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동쪽에는 효산과 함곡관이 험준하게 버티고 있습니다. 진나라는 진실로 땅이 비옥하고 백성들의 생활도 넉넉합니다. 만 량의 전차가 있고 백만의 군사가 있는 데다가 기름진 들판이 천 리나 이어져 있고 지세는 험하면서도 아주 편리합니다. 이는 천하를 지배할 나라로서 충분한 자격을 가진 것입니다. 또 대왕께서 현능(賢能) 하시고, 인구가 많은 데다가 막강한 전차와 기강이 엄격한 군대가 있어 여러, 제후국들을 차지하여 온 천하를 장악하고 통치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청컨대 대왕께서는 제 소견을 들어주십시오.”

 

소진이 이처럼 거시적인 배경을 설명했지만 진왕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그때는 막 상앙을 죽인 직후인 데다가 다른 나라에서 온 유세객을 그리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이유는 아직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고 소진이 한 얘기가 너무나 일반적이어서 구체적인 방법이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혜왕이 답장을 써서 말했다.

 

“짐이 듣건대 날개에 털이 부족하면 멀리 날 수 없다고 했소. 예악 제도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마음대로 남을 징벌할 수 없을 것이오. 도덕적 수양이 깊고 넓지 못하면 남을 함부로 가르칠 수 없고, 정치 법령이 이치에 합당하지 않으면 마음대로 대신들을 부릴 수 없는 법이오. 지금 선생께서 천 리도 마다치 않고 진나라에 와서 조정을 가르치려 하나 우리 진나라는 아직 선생의 의견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소!” 

 

이리하여 소진은 진왕에게 쫓겨나고 말았다.

 

소진은 1년 넘게 진나라에 머물면서 10여 차례 연달아 서찰을 올려 봤지만 진왕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가지고 있던 돈이 다 떨어지고 입고 있던 담비 가죽 외투도 다 해어지자 소진은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먼지만 흠뻑 뒤집어쓰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다 떨어져 가는 짚신을 가죽끈으로 동여매고 등에 책 보따리와 행랑을 맨, 얼굴은 까맣게 그을려 있었고 몸도 비쩍 말라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식구들도 그가 관직을 얻는 데 실패하고 돌아오자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아내는 그가 돌아온 것을 보고도 베틀에서 내려오지 않았고 형수는 밥 한 그릇 내주지 않았으며 부모마저도 말을 걸지 않았다. 식구들의 냉대에 크게 자극을 받은 소진은 탄식하여 말했다.

 

“아내도 남편으로 여기지 않고, 형수도 시동생으로 여기지 않으며, 부모님마저도 날 자식으로 여기지 않는구나! 이는 전부 진왕 때문이다. 내 기필코 오늘의 치욕을 갚고 말겠다!” 

 

그리하여 소진은 그날 밤부터 책을 찾기 시작했다. 집 안에 있는 수십 종의 책을 전부 꺼내 늘어놓고 보니 권모지술을 전문적으로 서술한 강태공의 병서 『음부 陰符』가 눈에 들어왔다. 소진은 보물을 얻은 것처럼 기뻐하며 주야로 이 책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마음속에 울분이 가득 찬 그는 잠을 쫓기 위해 머리를 대들보에 매달고 바늘로 허벅지를 찔러가며 독서에 전념하면서 스스로 맹세했다.

 

“군주들에게 유세하여 비단옷과 푸짐한 음식을 얻지 못하고 경상(卿相)의 지위를 차지하지 못한다면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않겠노라!”

 

1년간의 고된 독서와 심리분석을 통해 여러 분야에서 능력을 크게 향상한 소진은 마침내 자신감에 차서 말했다.

 

“이번에는 군주들에게 확실하게 유세하여 기필코 내 뜻을 이루고 말리라!”

소진은 노자를 얻기 위해 형제인 소대(蘇代)와 소력(蘇歷)을 불러 『태공병법 太公兵法』에 나오는 원리들에 대해 담론을 벌리면서 두 사람을 교묘하게 설득했다. 소진의 유세에 감탄한 두 형제는 많은 노잣돈을 내주었다. 이때부터 이들도 병서를 연구하기 시작해 나중에 유명한 유세객이 되었다.

 

소진은 이번에는 합종으로 진에 대항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먼저 조(趙)나라로 가서 조 숙후(肅侯)의 형제인 진양군(秦陽君)과 교우하려 했으나 가자마자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낙담하지 않고 계속 북상하여 연(燕)나라로 갔다. 연나라에서 1년 넘게 기다렸으나 연의 문공(文公)을 만나지도 못한 채 가지고 간 돈을 다 써버려 푼돈을 빌려 연명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하루는 문공이 문을 나서기를 기다렸다가 다가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자신을 만나 줄 것을 간청했다. 문공은 그가 이전에 진왕에게 유세했던 소진이라는 말을 듣고는 그를 궁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마침내 기회를 얻은 소진이 자기의 생각을 펼쳤다.

 

“연나라는 열국 가운데 결코 큰 나라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영토는 2천5백 리에 불과하고 군사력도 겨우 병거 6백 량에 기병 6천, 그리고 보병 10만 여에 지나지 않지요. 남쪽에 있는 제나라나 서쪽에 있는 조나라는 국력이 막강한데도 해마다 전란이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연나라만 평온을 유지하고 있지요. 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서쪽에 조나라가 있어 강력한 진나라를 막아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조가, 진에 투항하기만 하면 진은 곧장 연을 치려고 할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지금 조나라와 외교가 없고 되려 진나라와 연맹을 맺고 있는데, 이는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책략입니다. 게다가 만일 조를 화나게 하여 조의 병마가 아침에 출병하면 저녁에 도달할 터인데 이를 어떻게 막아내실 생각이십니까? 우선 진나라와 절교하고 모두가 연합하여 진에 대항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고 바람직한 전략입니다. 그래야만 열국이 모두 자국을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공은 소진의 견해에 공감하긴 했지만, 각국의 생각이 과연 일치할지 두려웠다. 이에 소진은 자신이 직접 나서서 각국을 연합시키겠다고 나섰다. 문공은 몹시 기뻐하며 그에게 수많은 거마, 황금 그리고 시종을 하사했다. 이리하여 소진이 조나라로 가자, 조의 숙후가 그를 반갑게 맞아들였다. 소진이, 숙후에게 말했다. 

 

“중원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는 조입니다. 게다가 조는 한(韓), 위 등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진이 중원으로 세력을 뻗고 들어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를 공격해야 합니다. 현재 진이 조를 공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한과 위가 방패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진이 군비를 갖춰 한과 위를 공격하면 두 나라는 진의 공격을 저지할 만한 큰 산과 강이 없기에 쉽게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조는 가장 먼저 공격을 받게 되지요. 지금 각국이 모두 진과 외교를 맺고 영토를 떼어주고 있지만, 진의 욕심은 이에 그치지 않고 대왕의 영토를 전부 집어삼키려 할 것입니다. 만일 중원의 여러 나라가 초를 끌어드려 연합하기만 한다면 땅이 진의 다섯 배나 되고 병력도 진의 열 배가 넘기에 더는 진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제 소견으로는 제후들을 한자리에 모아 동맹을 맺고 6국이 힘을 합쳐 진에 대항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 같습니다.”

 

아직 혈기가 왕성한 청년이었던 숙후는, 합종을 통해 진에 대항할 수 있다는 소진의 책략을 듣고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즉시 소진에게 만 량의 마차와 천 근의 황금, 백 쌍의 옥벽(玉璧)과 천 필의 비단을 주면서 각국의 제후들과 동맹을 맺어달라고 부탁했다. 바로 이때 진이 위를 공격하자 위는 열 개의 성을 바치면서 화친을 청했다. 이 소식을 들은 숙후는 진이 위를 친 데 이어 조를 공격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안절부절못하면서 소진을 불러 이 문제를 상의했다. 소진은 전쟁 준비를 서두르는 동시에 장의로 하여 진나라의 객경이 되어, 진을 설득시켜 조를 공격하지 못하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소진은 우선 조나라의 조야를 안정시킨 다음 다른 제후국들을 돌아다니며 유세를 시작했다.

 

당시의 급박한 정세 덕분에 한과 위, 제와 초 네 나라가 합종을 통해 진에 대항하는 데 순순히 동의하면서 소진의 유세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여섯 제후국의 재상이 되어 6국의 상인(相印-재상의 관인)을 목에 걸게 되었다. 초나라에서 조나라로 돌아온 그는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전과는 전혀 달라진 위세를 과시했다.

 

물론 그는 자신의 위세를 마음껏 과시하면서 과거 자신에게 불손했던 사람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었다. 그가 낙양을 지나게 되었을 때 부모가 직접 큰길까지 나와 그를 맞이했고 형수가 30리 밖까지 나와 길을 쓸고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올렸으며, 그의 아내는 먼발치에서 곁눈질로 바라볼 뿐 제대로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소진이 형수에게 물었다.

 

“형수는 이전에 나를 그렇게도 업신여기더니 어째서 지금은 날 이처럼 공경히 대하는 거요?” 

 

“도련님께서 막강한 권력과 지위, 그리고 엄청난 재산을 갖게 되셨기 때문이지요.”

 

이 말에 소진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가난하고 천할 때는 부모마저도 아들 취급을 하지 않더니, 이제 재산이 많고 지위가 높아지니까 먼 친척들까지도 날 두려워하는구나! 이러니 세상을 살면서 어찌 권세와 부귀를 멀리할 수 있겠는가!”

 

기원전 333년, 연, 한, 제, 위, 초, 조 여섯 나라는 혈맹을 맺고 형제가 되어 서로를 도우면서 진에 대항하기로 약속했다. 아울러 소진을 종약장(從約長-화약에 참여한 사람들의 우두머리)으로 삼고, 6국의 상인을 걸어주어 합종의 임무를 전담케 했다.

 

소진은 일정한 시간 일정한 범위, 내에서 어느 정도 전란의 위험을 감소시켰다는 점에 있어선 공로가 인정된다. 하지만 소진이 합종을 주장한 동기가 관직을 얻기 위한 것이었고 6국의 합종 역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여섯 나라를 이용한 일시적인 군사동맹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여하간에 소진의 활동은 화려했고 전례 없는 외교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그의 최후는 그리 원만하지 못했다. 이 역시 그가 한일과 행위방식에 의해 결정된 것이었다.

 

진왕은 6국이 합종의 동맹을 맺었다는 소식에 놀라움을 금치못했다. 대신 공손연은 먼저 조를 공격할 것을 주장했다. 조가 바로 합종을 발기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장의가 황급히 나서서 반대했다. 6국이 방금 합종한 상태라 힘으로 제압하는 것은, 너무 무모하고 위험하다는 생각에서였다. 한 나라를 공격하면 나머지 다섯 나라가 합세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문제가 더 심각해질 터이니 차라리 먼저 한두 나라를 설득하여 동맹에서 탈퇴하게 한 다음 나머지 나라들도 서서히 탈퇴시켜 동맹을 해체 시키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 장의의 책략이었다. 

 

“먼저 위나라에서 받은 성지들 가운데 몇 개를 반환하십시오. 그러면 위나라가 감격해 마지않을 것이고 다른 나라들은 이를 부러워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는 대왕의 따님을 연나라에 출가시켜 사돈을 맺으십시오. 그렇게 되면 6국의 합종책은 저절로 깨지고 말 것입니다.”

 

장의의 이러한 계책은 한편으로 진왕의 신임을 얻고, 다른 한편으론 진이 조를 공격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소진과의 약속을 지키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진왕은 장의의 계책을 그대로 실행에 옮겼고 과연 연과 위는 진과 외교를 맺게 되었다. 성질이 급한 조왕은 즉시 소진을 보내 연나라를 문책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연왕은 그에게 제나라가 연나라의 성지 열 개를 탈취해 갔다고 하소연하면서 이를 해결할 방법을 마련해달라고 간청하는 것이었다. 소진은 다시 제나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소진이 제왕에게 말했다.

 

“연의 성지 열 개를 돌려주시면 연은 몹시 감격할 것이고, 연왕도 대왕을 신임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대왕께서는 천하를 호령하시면서 패업을 세우실 수 있게 되지요.”

 

제왕은 원래 야심이 대단한 인물이라 종약장의 나라가 되지 못한 데 대해 억울해하던 차에 소진이 이렇게 말하자 순순히 수긍하고 연나라의 성지를 반환했다.

 

연왕은 매우 기쁘긴 했지만, 소진이 자신의 모친과 정을 통했다는 이유로 그를 존중하지 않았다. 소진은 6국의 합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세력 균형이며, 힘의 균형이 깨어질, 경우 합종은 오래 유지되기 어렵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연왕이 자신을 냉담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는 연왕에게 말했다.

 

“이제 저는 연나라에 별 쓸모가 없습니다. 차라리 제나라로 가서 겉으론 제의 신하가 되어 속으로는 연을 위해 힘을 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는 연왕도 바라는 바라 순순히 허락했다.

 

제의 선왕(宣王)은 성정이 음란하고 사치스러운 인물이라 소진은 이에 영합하여 널리 미녀들을 모으고 대규모 궁실을 축조했으며, 선왕의 부친을 위해 호화롭게 장례를 치러주었다. 선왕 자신은 어리석기 그지없었지만, 그의 신하인 전문(田文) 등은 소진의 속셈이 제나라의 재력을 소모 시키고 정치를 우롱하여 나라를 망치려는 것임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들은 몰래 자객을 시켜 소진을 살해하기로 마음먹었다. 자객이 비수로 소진의 배를 찔렀지만 금세 숨이 끊어지진 않았다. 소진은 비틀거리며 제왕을 찾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죽거든 제 머리를 길거리에 걸어두십시오. 그리고 제가 다른 나라와 내통했다고 말하면 누군가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 와서 모든 사실을 밝힐 것입니다. 그러면 절 죽인 사람을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제왕은 소진이 시키는 대로 했고 그 결과 자객을 잡을 수 있었다.

 

소진이 죽자 합종의 맹약은 더욱, 빠른 속도로 와해 되어갔다. 특히 소진이 연을 위해 제를 약화하려 했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제와 연 사이에 갈등이 증폭되었다. 이때부터 합종을 해체하고 연횡을 이루는 것이 진의 가장 큰 외교 목표가 되었다.

 

진 혜왕은 즉시 장의를 재상으로 중용해 연횡의 업무를 전담하게 했다. 장의는 원래 빈한한 집안 출신으로 소진과 함께 공부한 적이 있었다. 소진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공명과 이익, 봉록에 목숨을 거는 인물이었다. 벼슬길에 오르기 전에 힘들고 고달프게 떠돌아다닌 바 있는 그는 초나라에서 말단 객경을 지내기도 했다. 한번은 초의 영윤(令尹) 소양(昭陽)이 집에서 화씨벽(和氏碧)을 관상하고 있는데 갑자기 큰비가 내렸다. 갑작스러운 물난리에 모두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사이에 화씨벽이 없어져 버렸다. 그러자 소양의 집사 하나가 장의의 옷차림이 매우 남루한 것을 보고는 그가 화씨벽을 훔쳤다고 단정하고 목숨만 건질 정도로 심하게 매질을 했다.

 

얼마 후 가사인(賈舍人)이라 불리는 상인이 장의에게 소진이 조나라의 재상으로 있으니 그를 한번 찾아가 보라고 권했다. 애써 소진을 찾아갔으나 그는 장의를 매우 오만한 태도로 대했고, 이에 자극을 받은 장의는 한 길을 가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장의가 먹고 입을 것조차 없는 지경에 처하자 가사인은 또 그를 도와 진나라로 데려가서는 큰돈을 써서 그에게 진나라 객경의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가사인은 길을 떠나면서 감격에 겨워하는 장의에게 말했다.

 

“이 모든 것이 소진 상국께서 안배한 일이오. 나 역시 소 상국의 문객이지요. 그는 당신이 조나라에서 관직을 얻으면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 걱정돼서 당신에게 냉담했던 거요. 소 상국은 자신의 능력이 당신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소. 그래서 당신의 의지를 자극하여, 진나라로 오게 만든 것이오. 소 상국은 당신이 진왕에게 가서 조를 공격하지 말라고 설득해주길 바라고 있소.”

 

이 말을 들은 장의는 소진의 배려에 감격해 마지않았고, 이때부터 자신의 능력이 소진보다 낫다는 생각을 버리게 되었다.

 

장의가 진의 재상으로 임명되자 초 회왕(懷王)은 그가 화씨벽 때문에 겪었던 치욕을 복수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방비를 서두르는 동시에 먼저 강수를 두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소진의 합종책을 좇아 6국이 연합하여 진을 공격했다. 그러나 각국의 군심이 일치하지 않은 데다가 전투력도 강하지 못해 두 차례의 공격이 모두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

 

진 혜왕은 6국의 군대를 대파하긴 했지만, 제와 초가 여전히 강하기 때문에 제를 공격하려면 먼저 제와 초의 동맹을 깨뜨려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진왕은 수많은 예물과 함께 장의를 초나라로 보냈다. 장의는 먼저 막대한 보물로 초왕의 측근인 근상(斳尙)을 매수하고 6백 리에 달하는 상우란 땅을 초나라에 헌납한 다음 교언영색으로 초왕을 설득했다. 어리석고 욕심이 많은 초왕은 마침내 장의의 요구를 받아들여 사자를 보내 제왕을 모욕하고 절교를 선언하는 동시에 진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1년 후에 상우 땅을 접수하러 간 사람이 돌아온 후에야 장의의 말이 전부 속임수였음이 드러났다. 초왕은 대로하여 10만의 병력으로 진나라를 공격했지만, 군사 강국인 진과 제의 협공을 받아 대패했고, 이때부터 기세가 크게 꺾기고 말았다.

 

나중에 초 회왕은 검중 땅을 주고 장의를 얻었으나 그의 술책을 당해내지 못해 도로 진나라로 돌려보내고 말았다. 초 회왕은 줄곧 속임수에 당하다가 결국 진나라에서 도망쳐 초로 돌아가는 도중에 죽고 말았다.

 

장의의 공로를 높이 산 진왕은 그를 무신군(武信君)으로 봉하고 넉넉한 재물을 주어 열국을 떠돌면서 연횡의 책략을 실행하게 했다. 장의는 먼저 제나라로 가서 선왕에게 말했다. 

 

“초왕은 이미 진왕과 혼인을 통해 사돈이 되었고, 한과 조, 위와 연 네 나라도 모두 진에 땅을 헌납하여 우의를 다짐했습니다. 이제 대왕만 고립무원의 처지에 있으니 만일 6국이 연합하여 제를 공격한다면 대왕께선 어떻게 대처하시겠습니까?”

 

조나라에 가서도 장의는 무령왕(武寧王)에게 똑같은 말로 겁을 주었다. 조 무령왕은 뛰어난 재능과 지략을 갖춘 인물이었지만 급박 해진 정세에 하는 수 없이 화친을 맺었다. 장의는 이런 식으로 연나라에 가서도 다섯 개의 성지를 헌납하겠다는 다짐을 받아냈다.

 

장의는 외교적 사명을 멋지게 완수했지만, 진나라로 돌아와 보니 혜왕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무왕(武王)이 즉위해 있었다. 무왕은 평소 장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의는 몸을 뺄 방도를 찾아야 했다. 장의가 무왕에게 말했다.

 

“제왕은 저한테 속은 것에 대해 몹시 격분하고 있습니다. 만일 제가 위나라로 간다면 제는 틀림없이 위를 공격할 것입니다. 제와 위가 싸우고 있는 틈을 타서 대왕께선 한을 치십시오. 그러면 과거 주나라의 천하는 전부 대왕의 차지가 될 것입니다.”

장의의 제안에 귀가 솔깃해진 무왕은 그를 위나라로 보냈다.

 

위왕이 장의를 상국으로 맞아들이자 이 소식을 들은 제왕은 전문을 보내 각국에 이 사실을 알리고 다시 동맹하여 위를 공격하기로, 결정하는 동시에 장의를 잡는 사람에게 성지 열 개를 상으로 내리겠다는 포고문을 내걸었다. 위왕은 매우 불안해했지만, 장의에게는 충분한 계책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심복인 풍희(馮喜)를 초나라사람으로 변장시켜 제 선왕을 찾아가 말하게 했다. 

 

“대왕께서 장의를 미워하신다면 그의 뜻이 순조롭게 이뤄지게 해서는 안 되겠지요. 저는 지금 진에서 오는 길인데, 장의가 진을 떠나 위로 가는 것도 계략이라 하더군요. 대왕께서 위를 공격하신다면 진이, 한을 쳐서 주 왕실의 땅을 전부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정말로 위를 치신다면 또다시 장의의 계략에 걸려드는 일이 될 것입니다.”

 

제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즉시 군대를 철수시켰다.

 

위왕은 장의를 더욱더 신임하게 되었고 장의도 마침내 위왕을 위해 연횡의 책략을 완성해냈다. 그리고 기원전 309년, 장의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법률닷컴 이정랑 컬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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