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 莊公' 명예를 지키면서 목적을 이루는 통치술의 대가

[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典疏通]人物論(49) 통치자는 숨김의 도에 능해야 한다

이정랑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21/02/17 [23:01]

'장공 莊公' 명예를 지키면서 목적을 이루는 통치술의 대가

[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典疏通]人物論(49) 통치자는 숨김의 도에 능해야 한다

이정랑 칼럼니스트 | 입력 : 2021/02/17 [23:01]

 

 

본색을 감추고 기다렸다가 상대를 제압하여 대의명분과 명예를 지킨다.

 

중국인들은 ‘사람을 다스리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겼다. 그래서 각각의 왕조마다 풍부한 역사적 경험을 쌓아왔다. 야사와 전설도 대단히 많지만 이른바 왕조의 정사(正史)인 『24사 二十四史』만 하더라도 똑똑한 사람이 평생 읽어야 할 정도의 분량이다. 그 중, 어떤 부분을 들춰봐도 사람을 다스리는 일의 독특함과 심오함을 확인할 수 있다.

 

그중에는 성공에 관한 역사적 경험도 적지 않지만, 특히 기만적인 방법을 능숙하게 이용하여 성공한 예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런 기만술은 통치자들에게 확실한 도움을 주었으니, 그들이 명예를 조작하고 권력을 튼튼히 다질 수 있게 해주었다.

 

중국 역사에서 공공연히 인의와 도덕에 반대하고 기만과 사기를 숭상한 군주는 없었다. ‘간웅(奸雄)’이라 불리는 조조(曹操)도 감히 황제를 칭할 엄두를 못 내고 황제를 협박하여 제후들을 좌지우지했을 따름이다. 그 역시 도덕과 여론의 힘이 두려 웠던 것이다. 그러나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늘 부도덕하고 잔인무도한 일을 저질러왔다. 기만은 그들이 곧잘 써먹는 상투적인 수법이었고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이뤘으면서도 동시에 나무랄 데 없는 도덕적 면모를 꾸며냈다.

 

가장 성공적으로 기만술을 사용한 사람은 아마도 춘추시대의 정(鄭)나라 장공(莊公)일 것이다. 『춘추』는 장공에 관한 기록에서 첫 문장을 ‘정백이 언에서 단을 이겼다 鄭伯克段於鄢’라고 씀으로써 그 사건의 사회 윤리적 성격을 정의했다. 정백은 정나라 장공이며 단은 그의 친동생 태숙(太叔) 단(段)이다. 그리고 언(鄢)은 지명이다.

 

이 문장에서 가장 심오한 글자는 ‘이기다’라는 뜻을 가진 ‘극(克)’이다. 본래 군주가 신하를 죽인 때는 ‘정(征)’, ‘벌(伐)’, ‘토(討)’, ‘주(誅’ 같은 글자들을 쓴다. 그런데 이 ‘극’은 다툼의 상방이 평등한 관계이며 이긴 쪽이 고차원의 수단을 사용한 경우에만 쓴다. 장공은 정정당당하게 동생을 토벌했지만 실은 은밀히 함정을 파고 온갖 수단을 다해 명예를 차지했다. 이런 그의 악랄함과 거짓이 ‘극’이라는 한 글자에 확연히 드러난다.

 

『춘추』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면서 암암리에 칭찬과 비판을 가한다. 이것이 바로 ‘춘추필법(春秋筆法-대의명분을 세우는 사필(史筆)의 준엄한 논법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중국의 경서 『춘추』와 같은 비판적인 태도로 오직 객관적인 사실에만 입각하여 기록하는 것을 의미한다. 춘추직필春秋直筆 이라고도 한다)‘ 이다. 춘추시대는 주나라 이래로 이어져 온 예악(禮樂) 제도가 파괴되고 전통적인 도덕이 짓밟힌 시기였다. 『춘추』의 사관은 ’춘추필법‘으로서 무너진 예의와 도덕을 만회하려 했던 것이다. 한편 ’정백이 언에서 단을 이긴‘ 이 유명한 사건은 『좌씨전』에도 나온다. 좌씨전의 치밀하고 생생한 기록으로 이 사건은 더욱 널리 알려졌고 장공의 재능을 쉽게 분별할 수 있게 해주었다.

 

장공의 이름은 오생(寤生) 이었으며, 그에게는 ’단‘ 이라는 동생이 있었다. 모친 강씨(姜氏)는 오생을 너무 힘들게 낳은 나머지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 빼어난 용모에 머리가 좋은 단을 매우 아꼈다. 강씨는 남편 무공(武公) 앞에서 끊임없이 둘째 아들을 칭찬하며 그가 왕위를 이어받기를 바랐다. 이처럼 오생 사이에는 커다란 벽이 있었다. 하지만 현명했던 무공은 강씨의 청을 듣지 않고 큰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오생은 즉위하여 장공이 되었고 부친의 뒤를 이어 주나라 경사(卿士)의 자리에 올랐다.

 

강씨는 편애하는 둘째 아들이 군주가 되지 못하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녀는 장공에게 당장 단에게 다스릴 영토를 주라고 요구했다. 무슨 속셈인지 그녀가 주라는 영토는 ’제성‘ 이었다. 장공은 ’제‘가 정나라에서 가장 험준한 성이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해서 부친 무왕도 절대 남에게 맡기지 말라고 했음을 상기시켰다. 강씨는 장공을 설득하지 못하자 다시 경성을 단에게 주라고 말했다. 경성도 당시 정나라에서는 꽤 중요한 큰 성이었다. 장공은 머뭇거렸지만, 강씨의 계속된 성화에 결국, 동생에게 경성을 다스리도록 했다.

 

단은 도읍을 떠나 영지로 가기 전에 먼저 모친 강씨를 찾아가 작별 인사를 했다. 그는 아직 다른 생각을 품지 않았지만, 강씨는 언젠가 두 형제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린 차남에게 마음이 기울어져 있던 강씨는 단에게 미리 준비를, 해두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장공이 경성을 내준 것도 단지 자신이 졸라서 된 일이라고 말했다.

 

“네가 경성을 다스리게 됐지만 이르건 늦건 분명히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니 우선 병사와 말을 잘 훈련 시키거라. 기회가 오면 너와 내가 안팎으로 힘을 합쳐 네 형을 몰아내고 네가 왕이 되는 것이다.”

 

단은 강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단은 경성 대숙(大叔)으로 칭해졌다. 단이 경성에 둥지를 튼 뒤부터 벌이는 일들은 장공의 신하들을 불안하게 했다. 우선 은밀하게 병사들을 모집하고 말을 사들여 군대를 확충했고, 군대를 엄하게 훈련 시키면서 항상 행군과 사냥을 일삼았다. 다음으로 성벽을 높고 두텁게 쌓는 공사를 벌였다. 어느 날 대신 제중(制仲)이 장공에게 말했다.

 

“큰 성의 성벽은 도읍 성벽의 삼분의, 일을 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중간 크기 성의 성벽은 도읍 성벽의 오분의 일을 넘어서는 안 되며, 작은 성의 성벽은 십분의 일을 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조상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규칙입니다. 그런데 지금 태숙 단은 이 규칙을 크게 초과하여 성벽을 지었습니다. 군주께서는 이를 보고도 그냥 넘기시면 안 됩니다.”

 

장공은 그의 뜻을 잘 알면서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태숙은 국가를 위해 병마를 키우는 것이며, 또한 국가 방어를 위해 공사를 벌인 것이니 나무랄 필요가 없소. 게다가 모친께서 시키신 일이라는데 내가 어떻게 관여할 수 있겠소?”

 

대신들은 내심, 장공이 마음이 넓고 성품이 후덕하다고 생각했지만, 은근히 초조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신들은 다시 제족(祭足)을 장공에게 보내 설득하게 했다.

 

“군주의 모친은 탐욕스러운 분이니 어서 생각을 정하셔서 그분을 지방으로 보내십시오. 아울러 태숙의 세력이 더, 이상 커지게 놔둬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욱 수습하기가 어려워집니다. 벌판의 들풀도 가득 자라면 베어내기 어려운데 하물며 군주의 아우는 어떻겠습니까?”

 

마침내 장공이 마음속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불의를 저지르는 자는 반드시 화를 자초하게 되오. 그러니 그대들은 안심하고 기다리시오.”

 

이 말은 장공의 성격을 남김없이 드러내 준다.

 

얼마 후 태숙 단은 서쪽 변경과 북쪽 변경의 성들을 몰래 자신에게 귀속시키고, 겉으로만 장공의 통치에 따르는 척, 했다. 이 소식을 들은 공자 여(吕)가 급히 장공에게 달려가 말했다.

 

“국가는 둘로 나뉘어서는 안 되며, 군주가 둘이어도 안 됩니다. 앞으로 태숙을 어떻게 하시렵니까? 혹시 대왕께서 국가를 태숙에게 넘길 생각이라면 저를 그에게 보내 시중들게 하십시오. 그의 신하가 되면 그만이니까요. 하지만 그러실 생각이 없다면 제가 당장 달려가 그를 처단하고 백성들이 두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백성들이 태숙을 따르게 되면 더욱 손을 쓰기가 어려워질 것입니다.”

 

장공은 침착한 어조로 여를 타일렀다.

 

“그렇게 마음 쓸 필요 없소. 지금 태숙 단은 스스로 자신의 무덤을 파고 있으니 말이오.”

 

다시 얼마 후 태숙 단은 아예 서쪽과 북쪽 변경의 성들을 자기 것으로 공표하고 계속 세력을 확대했다. 자봉(子封)이 놀라 장공에게 달려가 말했다.

 

“이제 손을 써야만 합니다. 더, 이상 그가 성과 영토를 합병하게 놔둬서는 안 됩니다. 많은 인구와 넓은 땅을 갖게 되면 응당 세력이 커지는 법이고, 그때는 상대하기 어려워질 것입니다.”

 

장공은 여전히 태연한 기색으로 말했다.

 

“불의를 저지른 자는 백성들의 호응을 얻을 수 없소. 인구가 늘고 땅이 많아질수록 더 빨리 망하게 될 것이오.”

 

마침내 태숙 단은 성벽을 완성하고, 창칼 등 전쟁 무기와 보병 전차까지 갖춰, 모든 준비를 마쳤다. 바로 이때 공교롭게도 장공은 주나라 황제를 만나러 가서 도읍을 비워둔 상황이었다. 강씨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기고 태숙 단에게 편지를 썼다. 몰래 도읍의 성문을 열어 그를 도와주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미리 날짜까지 정해놓았다. 태숙은 모친의 편지를 받고 즉시 답장을 써 보내는 한편, 보병과 전차를 다 동원하고 부하 병사들을 도읍으로 보내 거사를 치르게 했다.

 

사실 장공은 모든 준비를, 다 갖춰 놓고 있었다. 그가 황제를 만나러 낙양에 갔다는 건 거짓 소문이었다. 그는 2백 대의 수레를 거느리고 몰래 길을 우회해 경성을 공략했다. 그리고 태숙의 편지를 지참한 사신이 지나가는 길에 공자 여를 매복시켰다. 여는 손쉽게 편지를 탈취하여 강씨가 받아보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장공은 완전히 주도권을 틀어쥐었다.

 

태숙은 병사를 일으킨 지 이틀이 채 안 되어 경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경악한 그는 며칠 밤낮을 달려 되돌아갔지만, 태숙이 군주를 공격하려 했음을 알게 된 병사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바람에 병력이 반으로 줄어버렸다. 태숙은 민심이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경성도 회복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언이라는 작은 성으로 달아났고, 그곳에서 패한 다음에는 공성이라는 더 작은 성으로 몸을 피했다. 마침내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지자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장공은 동생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즉시 그곳으로 달려가 시신을 껴안고 통곡했다. 그는 울면서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내 아우가 천인공노할 죄를 저지르긴 했지만, 친형으로써 어찌 용서하지 않을 수 있으랴!”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이로써 장공은 또 한 번 민심을 얻었다. 백성들은 입을 모아 그가 좋은 형이라고 말했다.

 

장공은 동생의 몸에서 강씨가 보낸 편지를 찾아 읽고 불같이 화를 냈다. 그는 제족을 시켜 그 편지를 강씨에게 전한 뒤, 그녀의 거처를 성영으로 옮기게 하고 맹세했다.

 

“내가 황천에 가기 전까지는 절대로 모친을 만나지 않겠다.”

 

장공은 동생을 제거하고 모친을 쫓아냄으로써 군주의 지위를 튼튼하게 다졌다. 당연히 마음이 한결 편안하고 즐거워졌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인물의 도덕적 인품을 매우 중시했다. 특히 모친과 자식 간의 인륜은 더더욱 중요했다. 비록 강씨가 장공에게 이런저런 잘못을 저지르긴 했지만 어쨌든 그녀는 장공의 모친이었다.

 

따라서 여론은 전적으로 장공에게 기울지 않았다. 사람들이 장공의 처사가 불효라고 수군대자 장공은 꽤 난감해졌다. 장공은 모자간의 정으로 자신의 처사를 반성하는 것은 둘째 치고, 손상된 명예를 회복하고 싶었다. 하지만 죽기 전에는 모친을 보지 않겠다고 이미 맹세한 이상, 스스로 그 맹세를 깬다면 웃음거리가 되어 군주의 위엄이 훼손당할까 봐 두려웠다.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속만 태웠다.

 

그때 변경을 관리하는 말단관리 영고숙(穎考叔)이 새를 바치러 장공을 찾아왔다. 장공은 그에게 무슨 새를 가져왔느냐고 물었다.

 

“이 새는 부엉이라고 합니다. 별로 좋은 새가 아니지요. 낮에는 잘 보이지 않아서 주로 밤에만 활동합니다. 그리고 아비 어미가 힘들어 다 길러놓으면 그들을 잡아먹는 불효막심한 새입니다. 청컨대 이 새를 벌하소서.”

 

장공은 그의 말에 뼈가 있음을 알았지만, 너그러이 내버려 뒀다. 마침 식사 때가 되어서 장공은 그에게 함께 음식을 들자고 제의했다. 그런데 영고숙은 밥을 먹으면서 음식의 고기를 일일이 골라냈고, 식사를 마치고는 그것을 곱게 포장하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여긴 장공이 그 까닭을 물었다.

 

“저희 모친은 별의별 음식을 다 드셔보았지만 유독 군주가 하사한 음식만은 드셔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친께 음식을 싸가려는 것입니다.”

 

장공이 찬탄하여 말했다.

 

“남들은 다 효도할 모친이 있는데 내게는 왜 없단 말인가? 내가 비록 제후라 해도 자네 같은 평민만큼도 부모에게 효도할 수 없네그려.”

 

영고숙은 일부러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태부인(太夫人)께서 아직 살아 계신데 어째서 효도를 할 수 없다 하십니까?”

 

장공은 그에게 강씨를 쫓아내고 맹세한 사연을 털어놓았다.

 

영고숙이 다시 말했다.

 

“황천에 갈 때까지 만나지 않겠다고 한 것이 꼭 죽은 다음에 만나자는 뜻은 아닙니다. 황천(黃泉)은 곧 저 땅속 깊은 곳의 샘을 가리킵니다. 지하에 굴을 파서 샘에 이른다면 그곳이 바로 황천이지요. 두 분이 그 땅굴에서 상봉한다면 누가 군주를 불효자라 하겠습니까? 도 누가 맹세를 어겼다고 하겠습니까?"

 

장공은 과연 옳은 말이라 여기고 그의 방법을 따랐다.

 

영고숙은 5백 명의 병사를 시켜 신속하게 땅굴을 파고 그 안에 방을 만들었다. 그런 뒤 땅굴 한쪽으로는 강씨를, 다른 한쪽으로는 장공을 불러들여 그 방에서 만나게 했다. 모자는 서로 부둥켜안고 그간의 잘못을 용서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예전처럼 화목해졌다.

 

장공은 이제 효자의 명성까지 얻었다. 정나라 장공이 정말 도적적인 인물이었는지는 그가 나중에 저지른 두 가지 사건을 살펴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장공은 자기 일에 바쁜 나머지 오랫동안 낙읍에 가지 못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주나라 평왕(平王)이 자신을 계속 경사로 등용하지 않으리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는 부랴부랴 낙읍으로 달려가 평왕에게 자신은 능력이 없어 자진하여 사퇴하겠다고 말했다. 본래 괵나라 군주에게 경사를 맡기려 했던 평왕은 대체 어떻게 말이 새 나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난처해진 평왕은 인사를 바꿀 계획이 없었다고 한사코 둘러댔다. 하지만 그럴수록 장공은 자기 능력이 괵나라 군주보다 못하다고 말했다. 평왕은 하마터면 장공 앞에 무릎을 꿇을뻔했다. 나중에 정말 방법이 없어진 평왕은 정 자신의 말이 미덥지 않다면 태자를 정나라에 불모로, 보내겠다고 말했다. 평왕의 신하들은 이 방법이 너무나 온당치 않다고 여겼지만, 장공이 두려운 나머지 대신 그의 아들도 불모로, 삼아 맞바꾸자고 제의했다. 장공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태자가 불모가 된 것은 중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로 인해 주나라의 체면은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신하가 왕의 아들을 인질로 삼는 것은 대역무도한 일이니, 이것으로써 장공의 진면모를 알 수 있다. 평왕이 죽은 뒤, 태자 호(狐)는 낙읍으로 돌아왔지만, 원래 몸이 약한 데다 마음의 상처까지 깊어 곧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래서 다른 아들이 황제가 되었는데, 그가 곧 환왕(桓王)이다. 뜻밖에도 환왕은 강경하게 장공의 전횡에 맞섰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장공의 경사 직위를 박탈하려 했다. 이 사실을 안 장공은 사람을 보내 주나라 황실의 말을 베는 도발을 저질렀다.

 

다행히 이때는 환왕이 양보하여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몇 년 뒤, 환왕은 끝내 장공을 면직시키고 그 자리에 괵나라 군주를 앉혔다. 장공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환왕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주 왕실의 것이 아닌 12개 읍을 정나라의 4개 읍과 바꾸었다. 정나라는 고스란히 4개의 읍을 잃고 말았다. 급기야 환왕은 장공이 자신을 알현하러 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진(陳), 채(蔡), 위(衛)의 군대를 몰아 정나라를 토벌하러 갔다. 이때 주나라 군대는 전통에 따라 좌군, 중군, 우군으로 진을 편성했다. 중군은 왕이 직접 인솔하는 주력군이며 좌군, 우군은 중군을 엄호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정나라의 자지(子之)는 이런 전통적 진법과는 상이한 진법을 제시했다. 그는 주력군을 좌군, 우군으로 삼고 중군을 그 뒤에 두었으며, 전투용 수레를 앞에, 보병을 뒤에 배치했다. 그는 먼저 적의 좌우 양 날개를 격파하고 중군을 포위할 생각이었다. 또 자지는 적의 우군인 진나라 군대를 먼저 깰 것을 주장했다.

 

왜냐하면, 당시 진나라는 내란에 휩싸여 있어서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전투는 완전히 자지의 예측대로 전개되었다. 진나라 군대가 패한 뒤, 좌군인 괵나라 군대도 덩달아 도망쳐버렸다. 결국, 중군만 남아 겹겹이 포위되었고 정나라 장수 축담(祝聃)이 환왕의 어깨에 화살을 명중시킴으로써 주나라 군대는 완전히 패배했다. 축담은 달아나는 적군을 뒤쫓으려 했지만, 궁지에 몰린 적을 너무 핍박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장공이 그를 말렸다.

 

그날 밤, 장공은 사신을 보내 의기소침해진 환왕과 주나라 군사들을 위문했다. 그는 환왕 및 제후들과 화해하길 원했다. 이때부터 주나라 천자가 하늘의 명을 받았다는 믿음은 철저히 깨졌다. 즉, 황제의 권위가 완전히 유명무실해진 것이다.

 

동생의 반역을 처리한 장공의 태도에는 고차원의 술책이 숨겨져 있다.


그는 모친과 동생이 두 마음을 품고 있음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미리 손을 써서 제지했더라면 동생은 죽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장공은 동생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면 자신의 마음이 단 하루도 편치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동생은 언제든 반역을 도모할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번번이 가혹한 조치를 할 수도 없었다. 자칫 인자하지 못하다는 악명을 뒤집어쓸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단번에 뿌리를 뽑을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는 편이 나았다. 그래서 장공은 한발 한발 동생을 반역의 길로 들어서게 했는데, 이 모든 것이 그의 계산이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줄곧 인자하고 후덕한 사람으로 비쳤고 심지어 신하들조차 그를 위해 마음을 졸였다.

 

권력을 위해 형제의 정도, 모자지간의 정도 돌보지 않았다. 동생을 죽인 것도 모자라 모친을 내쫓았으니, 이것이 이른바 ’인자(仁者)‘의 숨겨진 이면이다. 구체적인 실천 과정에서 장공은 속내를 숨기고 결코, 드러내지 않았다. 무엇을 내보이고 싶으면 먼저 숨기고, 또한 무엇을 사로잡고 싶으면 몰래 뒤를 쫓는 책략을 사용했다. 이런 그의 음흉함은 곧 커다란 명성을 얻기 위해서였으니, 여기에는 인내의 기술이 따라야 했다.

 

중국 역사에서 살인은 반드시 명분이 있어야 했다. 명분 있는 살인이라면 죽는 자도 원망의 말을 하지 못하고, 제삼자도 비방의 말을, 못하는 것이 보편적인 역사의 경험이었다. 만약 그 살인자들과 희생자들을 진지하게 분석해본다면, 권력욕과 인성 사이의 잔혹한 투쟁에 아마도 경악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해야만 인간의 권력욕을 제한하고 정상적인 인성을 발달시킬 수 있는지는 우리가 두고두고 생각해볼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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