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문의 ‘종손’ 지위는 단순한 역할이 아니라 친족관계에 따라 정해지는 신분적 지위이므로, 개인 간 합의나 공증만으로 다른 사람에게 넘길 수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1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종중 이사 지위를 인정해달라며 A씨가 낸 가처분 사건 재항고심에서 원심 결정을 뒤집고 파기자판해 신청을 기각했다.
파기자판은 상급심이 원심 판결을 파기하면서 사건을 다시 돌려보내지 않고 직접 결론을 내리는 방식이다.
이번 사건은 1992년 종중의 종손이었던 B씨가 사망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본래 종손 지위를 이어받아야 했던 장손 C씨는 임야와 묘지 관리, 제사 주재 등 종손의 책무를 자신의 숙부이자 B씨의 차남인 A씨에게 승계한다는 내용의 합의서를 작성했고, 이를 공증까지 받았다.
이후 종중은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A씨는 ‘종손은 당연직 이사’라는 종중 규약에 따라 30년 넘게 종손 역할을 하며 제사를 주재해왔다.
하지만 갈등은 2024년 불거졌다.
종중 회장이 A씨에게 “이사 임기가 만료됐다”는 내용증명을 보내고, 이어 열린 정기총회에서 ‘종손은 종회의 족보 기준에 따라 정한다’는 안건이 가결되면서다.
이에 A씨는 총회 결의가 무효라며 자신이 종중의 당연직 이사 지위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법원은 1심에서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종손은 일정한 친족관계의 존재에 의해 당연히 인정되는 신분적 지위로서 양도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이어 “일반적으로 종손은 장자계의 남자손으로서 적장자손을 의미한다”며 “공동상속인 간 협의로 정할 수 있는 제사 주재자와는 구별해야 한다”고 밝혔다.
특히 대법원은 종손의 지위를 ‘일신전속적 성격’으로 규정했다. 이는 타인에게 양도하거나 이전할 수 없는 성질을 뜻한다.
재판부는 “실제 종손이 아닌 사람을 종중이 오랫동안 종손처럼 인정해왔더라도, 그것만으로 법률상 종손 지위를 취득했다고 볼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또 “A씨는 승계 합의에도 불구하고 종손 지위를 양도받지 못했고, 규약상 당연직 이사 지위 역시 취득하지 못했다”며 “종중이 장기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더라도 결론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이번 판결은 전통적인 종중 질서와 현대 법리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종손’이라는 지위가 단순한 관습적 역할이 아니라 법적으로도 엄격한 친족관계에 기반한 신분임을 다시 확인한 사례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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