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현령 房玄齡' 명군을 만든 명재상의 완벽한 보좌는 후세의 귀감

[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典疏通]人物論(60) 사람을 알고 쓰면 큰 길이 보인다.

이정랑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21/05/05 [04:15]

'방현령 房玄齡' 명군을 만든 명재상의 완벽한 보좌는 후세의 귀감

[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典疏通]人物論(60) 사람을 알고 쓰면 큰 길이 보인다.

이정랑 칼럼니스트 | 입력 : 2021/05/05 [04:15]

 

큰 능력을 작게 사용하면 위태롭고 작은 능력을 크게 사용하면 좌절한다.

 

방현령(房玄齡)은 당 태종 이세민의 개국공신이었으나, 중국 역대 재상의 계보 중에서는 그다지 유명한 인물이 아니었고, 희곡이나 소설 등의 문학작품에서 다뤄진 예도 거의 없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진정한 재상의 재목이었고, 역대 재상의 모범이었다. 방현령과 이세민의 관계는 물과 물고기의 관계와 같았다. 이세민이 없었다면, 그는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고, 이세민도 그가 없었다면, 사서(史書)에 기록된 이세민이 되지 못했을 것이며, 당 왕조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이세민과 방현령이 서로를 이해하고 선택하는 과정에는 심오한 의미가 숨어 있다.

 

방현령은 20년 가까이 태평성대의 재상을 지내다가, 70세에 병으로 죽을 때까지, 충실하고 유능한 재상으로, 처음과 끝을 아름답게 장식했다. 방현령은 북주(北周) 무제 건덕(建德) 8년(579)에 제주 임치에서 태어났다. 증조부와 조부가 모두 북제(北齊)에서 벼슬을 지냈고, 부친 방언겸(房彦謙)은 당대의 유명한 학자로서, 조정과 민간을 아우르는 많은, 지식인들과 교류하고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수 왕조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지만, 수 왕조가 오래지 않아 망할 것을 예감하고, 서둘러 관직을 사임했다. 관직에 있는 동안, 백성들의 복리를 위해 적극적으로 헌신했던, 그는 백성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이런 가정에서 태어난 방현령은, 어려서부터 철저한 가정교육을 받으면서, 점차 치국안민에 힘써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주겠다는, 원대한 뜻을 세우게 되었고, 아울러 정치적 통찰력을 키워가게 되었다. 때문에, 수 문제(文帝) 시절,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수 왕조의 공덕을 칭송하고 있을 때, 방현령은 화려한 공덕 뒤에 숨은 위기를 간파하고 이렇게 말했다.

 

“수나라는 원래 남의 나라를 찬탈한 정권으로서 백성들에게는 아무런 공덕도 베푼 바가 없이 백성들을 기만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은 또 형제지간에 황위를 놓고 다투고 있고 귀족들은 귀족들대로 향락에 젖어 파벌싸움만 일삼고 있으니 이런 왕조가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방현령의 이러한 선견지명은, 얼마 후에 사실로 입증되었다. 방현령은 개인적 품성도 뛰어나서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그는 세상이 다 알아주는 효자였다. 비록 계모였지만, 효성이 지극하여 그녀가 병들었을 때는 의원을 불러다 약을 달여 올렸고, 의원이 찾아올 때마다 울면서 시중을 들었다. 그런데도 계모가 사망하자 너무나 상심한 나머지 식음을 전폐하여, 몸이 장작개비처럼 비쩍 말랐던 적도 있다. 부친에 대한 효성 또한 말할 것도 없었다. 오랜 병에는 효자가 없다는 속담도 있지만, 부친이 병으로 누워있는 백일 동안 방현령은 시종 한결같은 정성으로 부친을 모셨고, 침식을 함께하며 극진히 보살폈다. 그의 이러한 품성은 나중에 관료로 성공하는데도 큰 작용을 하게 된다.

 

당시 수 왕조에서 관리 선발과 인사를 맡았던, 이부시랑(吏部侍郎) 고효기(高孝基)는 그를 이렇게 평하고 있다.

 

“내가 만나본 젊은이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방현령처럼 착실한 인물은 본 적이 없다. 난 그가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일찌감치 예견했다.”

 

태원에서 군사를 일으켜 수 왕조에 대해 반란을 꾀한, 이연이 아들 이세민을 보내, 위수 이북 지역을 평정하자, 습성의 현위로 있던 방현령은 반란의 경과를 분석하고는, 수 왕조가 곧 멸망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각 지역에서 일어난 반군 가운데, 이연의 군대가 가장 대의가 분명하고 민의에 부합 하며, 선비를 예우할 줄 안다고 판단하고는 의연히 수 왕조의 관직을 버리고, 이세민에게 투항했다. 당시 이세민은 약 8백 리나 떨어진 곳에 군막을 치고 있었지만, 방현령은 지팡이를 짚고 찾아가 이세민을 만났다. 처음 만난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의기투합했고, 이세민은 그에게 위북도행대기실(渭北道行臺記室)이라는 중직을 맡기면서 참모로 삼았다.

 

이때부터, 이세민과 방현령은 떨어질 수 없는 인연으로 맺어졌다. 30여 년 동안 긴밀한 군신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세민은 역사의 명군이 되었고 방현령은 명재상이 되었다.

 

방현령은 이세민을 따라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면서 수나라의 대장 왕세충(王世充)을 토벌하는 작전을 비롯하여, 중요한 전투마다 적극적인 전략을 제시하여 큰 공을 세웠다. 작전이 끝나고 틈이 날 때마다, 그는 이세민과 함께 왕원지(王遠知)라는 도사를 찾아갔다. 왕원지는 도를 깨우쳐 과거 천년, 미래 5백 년까지의 모든 일을, 꿰뚫고 있다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평민으로 가장하고 찾아갔지만, 왕원지는 이들을 한눈에 알아보고 이세민에게 말했다.

 

“곧 태평성대의 군주가 될 터이니 스스로 잘 준비하십시오.”

 

이 말을 들은 방현령은 더욱 전심전력하여 이세민을 보좌했고, 그가 천하의 주인이 되도록 도왔다.

 

이세민은 혁혁한 전공을 세운 덕에, 진왕(秦王)으로 봉해져 당대에 처음 설치된 천책상장(天策上將)이라는 관직에 오르면서, 막강한 권력을 지니게 되었다. 또 그는 인재를 끌어모으고, 활용하는데 뛰어났다. 진왕 이세민의 막부에는 이른바 ‘18학사’라 불리는 인재 집단이 있었다. 이 가운데 방현령과 두여회(杜如晦)는 지모와 지략이 뛰어났고, 육덕명(陸德明)과 공영달(孔穎達)은 경학에 정통했으며, 요사렴(姚思廉)은 문학과 시문에, 우세남(虞世南)은 서예에 뛰어났다. 그 밖의 인물들도 하나같이 뛰어난 준 걸 들이였으나, 18학사 가운데 방현령이 단연 으뜸이었다.

 

진왕부가 유지됐던 10년 동안, 이세민을 도와 인재를 끌어모으는 것이 방현령의 가장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였다. 『구당서 舊唐書』 「두여회전 杜如暿傳」의 기록에 따르면, 맨 처음 두여회는 이세민의 수하에서 병조참군을 지냈다. 그의 임무는 병사들의 훈련을 돕는 것이라 그리 중요한 편은 아니었다. 나중에 진왕부의 인맥이 두터워지자, 인재들이 전국 각지로 흩어지게 되면서 두여회도 외지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방현령은 즉시 이세민에게 달려가 말했다.

 

“진왕부의 인재들 가운데 외지로 나가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괜찮지만, 두여회만은 절대로 내보내선 안 됩니다. 그는 대세를 읽을 줄 아는 인물로서 천하를 안정시키려면 반드시 필요한 인재입니다.”

 

이세민은 이 말을 듣고 감격하여 말했다.

 

“그대가 이런 사실을 일깨워주지 않았더라면, 큰 인재를 하나 잃을 뻔했구려!”

 

이세민은 즉시 조령을 취소하고, 두여회를 중용했다. 그 후 여러 해에 걸친 검증을 통해 방현령의 판단이 정확했음이 판명되었다. 두여회는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마다, 정확한 판단과 결단력을 보여주었고, 방현령과 더불어, 당나라의 안정과 번영에 크게 공헌하면서 ‘방모두단(房謀杜斷’-방현령의 지모와 두여회의 결단력을 의미한다) 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또 방현령은 이세민의 동정서벌(東征西伐)을 수행하면서, 가는 곳마다 민심을 파악하고 민간 풍속이나 전대의 문헌 자료를 수집하여 정책 결정을 할 때 중요한 자료로 삼았다. 각 지방에서 봉기한 군사가 전부 평정되자, 방현령은 이세민에 의해 임치후에 봉해졌고, 관직도 진왕부기실로 승급되어, 모든 군정문서를 관장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민첩한 사고와 뛰어난 문장력을 지닌 그의 손에 의해 많은, 문서들이 기안되기 시작했다.

 

이세민과 그의 형 이건성이 황위를 놓고 각축을 벌이면서, 형제간의 싸움이 더 물러설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방현령은 결단력 있는 행동을 주장하여 이세민으로 하여 먼저 손을 써서, 이건성과 이원길을 제압하게 했다. 방현령을 비롯한 여러, 대신들의 적극적인 간언에 따라 이세민은 진왕부에서 긴급 군사 회의를 소집했다. 그리고 현무문에 병력을 매복시켜 입조하는 이건성을 살해하는 이른바 ‘현무문 정변’을 일으켰다. 태자가 된 이세민은 곧이어 부친 이연마저 제압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서기 630년, 당 태종 이세민이 등극한 지 4년째 되던 해에, 방현령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로 승급하여 재상의 직책을 맡게 되었고, 그 후 20여 년 동안 그 자리를 유지하다가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재상으로 있는 동안 방현령은 근면함과 충성을 다하면서, 탁월한 공적을 이루었다. 사서에서도 그를 이렇게 칭송하고 있다.

 

“그는 총백사(總百司-정부의 각 아문衙門을 총괄하는 직책)를 지내면서 공경함과 근면함을 잃지 않았고, 사소한 일에도 최선을 다해 놓치는 일이 없었다.”

 

인재 선발에 있어 서도 방현령은 남다른 신중함을 보였다. 태종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관리를 등용할 때는 절대로 경솔함에 빠져선 안 된다. 군자를 쓰게 되면 많은, 군자들이 이를 따라 몰려오지만, 소인배를 쓰게 되면 많은, 소인배들이 달라붙기 때문이다.”

 

방현령은 인재를 변별할 줄 알았고, 이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할 줄 알았다. 태종의 태자 이치(李治-당 고종을 말함)의 부하 중에 이대량(李大亮)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방현령은 그가 전한의 충신 왕릉(王陵)이나 주발(周勃)처럼 강직하고 굳은, 절개를 가졌다고 판단해 중용했고, 얼마 후엔 자신의 조수로 발탁했다.

 

방현령의 인재 관리술은 한쪽에 편중되지도 않고, 전인적인 자질을 요구하지도 않는 것이 특징이다. 사람을 쓰되 최대한 단점을 억제하고, 장점을 발휘하도록 노력했다. 적당한 인재를 찾지 못할 경우는 일시적으로 비워둘지언정, 아무나 대려다 쓰진 않았다. 예컨대 조정의 재정과 지출을 관장하는 관직이 오랫동안 공석이었지만, 이 자리가 천하의 이해관계와 민심에 직결되는 중직인 만큼, 함부로 등용하지 않았다. 권력을 부여하는 일에서만큼은, 절대로 경솔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방침이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다른 사람들에게 권력을 주는 데, 몹시 인색하게 비쳐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명성은 그리 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세민에게 직언하는 데 있어 서도 그는 대담했다. 위징처럼, 사사건건 직언하지는 않았지만, 항상 자신의 소신을 용감하고 분명하게 밝힐 줄 알았다. 사실 이점에서는 위징도, 그를 매우 존경하여 언사의 극진함과 처사의 치밀함은, 자신도 방현령을 따를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한번은 태종이 갑자기 주위의 신하들에게 처음 나라를 세운 황제가 황위를 물려줄 때마다 큰 혼란이 발생하는 원인이 무엇인가 하고 묻자, 방현령이 나서서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황제는 자식을 몹시 총애하지만, 자식은 깊은 궁궐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부귀영화를 누리며 자라다 보니, 세상 물정을 모르고 국가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는 스스로 수련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키우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실제로 정관의 치세(貞觀의 治世-당태종의 치세(626~649)로, 모범적 치세로 꼽힌다. 이때의 연호가 정관이다. 방현령, 두여회, 위징 등의 명신들을 등용하여 율령체제의 정비, 학교᭼과거제도의 발달 등 선정을 베풀어 나라가 융성했다)를 자랑하는 당 태종도 과실을 많이 범했다. 예컨대 고구려 정벌을 감행하여 고구려의 백성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국 백성들에게도 치명적인 상처를 주었다. 여러 차례에 걸친 고구려 정벌에서 싸움에 동원됐던, 병력과 물자의 8할을 잃었던 갓이다. 정관 22년, 태종이 다시 고구려를 침략하려 했을 때였다.

 

중병으로 누워있던 방현령은 이 소식을 듣고 당장 태종에게 정벌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자기의 아들들을 불러모아 말했다.

 

“지금 천하가 안정되어 백성 모두가 제자리를 잘 지키고 있는데, 또 동으로 고구려를 정벌하려 하시니, 이는 나라에 큰 우환이 될 것이 분명하다. 비록 나는 곧 세상을 떠나 땅속에 묻힐 몸이지만, 이런 일을 알고서도 말을 안 할 수 없구나. 죽어서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한편 태종은 그의 상소를 읽고 나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이처럼 나라를 걱정하고 있으니 정말 얻기 힘든 충정이로다!”

 

방현령은 어려서부터 전대 여러 왕조의 흥망성쇠에서 교훈을 찾았고, 이를 바탕으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다. 이 가운데 『진서』를 비롯하여 수 왕조까지 여섯 왕조의 역사를 편찬한 것을 주요 저술로 꼽을 수 있다. 

 

정관 22년(서기 648년), 방현령의 병세가 위급해지자 태종은 쉴새 없이 사람을 보내 문안했고, 직접 병상을 찾아가 방현령의 손을 잡고 임종을 지키기도 했다. 그가 눈을 감았을 때 태종이 보였던 눈물은, 군신지간의 깊은 우애를 대변하고도 남는다.

 

방현령이 이처럼 정치 역정의 처음과 끝을 아름답게 장식할 수 있었던 요인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역사의 흐름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일찌감치 자발적으로 이세민에게 투항했고 둘째, 지극한 충성과 근면함 때문에 이세민이 그를 신임할 수밖에 없었으며 셋째, 대권을 쥐고도 절대로 이세민이 위협을 느낄 만한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든 일을 잘 처리하면서도 이세민에게 충분한 자문역할만 했을 뿐, 혼자서 어느 한 분야의 권력을 독점하지, 안했던 것이다.

 

이러한 자질을 갖추기만 한다면 폭군을 만나도 자신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고, 다행히 명군을 만나면 탁월한 공적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다. 태평성대에 군주가 되는 것은, 쉽지만 재상이 되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군주를 보필하는 것은 호랑이와 함께 사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현령은 20년간이나 안정적으로 재상의 직분을 수행했고, 죽어서는 무한한 명예를 누렸다. 이는 중국 관료 사상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이다.

 

군신이 서로를 잘 알아 힘이 되어주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통치계급의 모습일 터인데, 하물며 명군과 현신이 만났으니,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겠는가! 이세민과 방현령의 이야기는 후세의 통치자들에게 영원한 귀감(龜鑑)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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