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변방목회’ 8년 시골, 32년 달동네 목사의 40년 목회 일지달동네 목사 40년 분투일지, ‘예수의 벗’ 마이너리티에서 빛났던 복음국민 5명 중 1명만 한국교회를 신뢰하는 시대이다. 2023년 2월 발표 기독교윤리실천운동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 결과, 교회를 ‘신뢰한다’라는 의견에 21.0%, ‘신뢰하지 않는다’에는 74.0%가 공감을 표시했다.
목사와 기독교인들의 말과 행동에 믿음이 가는지를 묻는 말에도 각각 20.8%와 20.6%만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목사 양성 교육기관인 신학대학원의 정원 미달 추세는 교단 불문 경향 각지에서 매해 확산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전액 장학금 제도를 운용하는 교단도 있다. 아니, 이제는 ‘목사’는 어디서 자기 신분을 드러내기 힘든 직업이 됐다.
목사는 무엇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여기 40년 중 전기 전화가 잘 들어오지 않는 농촌에서 8년, 청계천 변 빈민들의 집성촌이었던 곳으로 이주해 32년간 목회 활동하고 피 한 방울 안 섞인 후임에게 교회를 이양하고 서울 밖으로 이주한 원로 목사의 목회 후일담이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서울노회 홍익교회 김태복 원로 목사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1968년 장로회신학대학교 실천신학 교수의 소개로 경기도 남양주 화도읍 가곡리에 교육전도사로 부임해 담임목사로 사역하다가 1975년 서울 성동구 마장동 홍익교회로 옮겨 모두 40년 동안 교인과 교회를 섬겼다.
병참기지 춘천서 태어나 행상하던 청소년기 ‘집안 희망’ 형님 죽음에 종교인의 길 택하는데
병참기지나 다름없던 강원도 춘천에서 농부이자 도장포 주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저자는 여느 1941년생처럼 해방, 이념 혼란, 전쟁, 전후 복구, 압축성장, 독재, 민주화, 탈권위의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살아왔다. 그 세대의 부인할 수 없는 운명은 ‘희생’이었다.
형의 진학을 위한 희생양으로 야간 고등학교에 다녔던 저자는 낮에 어머니가 차려준 손수레에서 행상하며 살림의 한 부분을 맡아야 했지만, 남몰래 집어 가는 사람을 붙잡을 숫기마저 없어 결국 장사를 포기했다. 뒤늦게 주간으로 편입했지만, 야간 시절 전기가 끊어지면 곧바로 하교해야만 했던 터에 기초 학력이 모자라 평소 품었던 육사로의 진학의 꿈은 포기해야만 했다.
루저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인지 전공인 농학을 제쳐두고 도서관에서 이런저런 철학책을 빌려와 남독濫讀하며 룸펜의 길을 걷는 듯했다. 이 와중에 집안의 희망이었던 형이 초등학교 교사 재직 중 연탄가스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충격은 집안을 집어삼켰다. 농협 직원을 꿈꾸던 저자는 돌아서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 들어가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됐다. 미디안 광야에서 모세에게 고난받는 히브리인들을 보여준 하나님은 저자에게도 이름 없고 빛에 가려진 이들을 일러줬다.
전기 전화 없는 시골로, 청계천 빈민가 동네로 퍼주는 사랑, 불붙은 기도…‘40년 목회’의 동력으로
전기와 전화가 없이 시골 경기도 남양주 화도읍 가곡리, 천마산이 보이는 정경에서 저자는 평소에는 새벽종을 울리고 호롱불을 켜며 겨울철엔 땔감을 난로에 넣고 교인을 맞이했다. 갓난아기가 있음에도 주일이면 먼 곳에서 오는 교인을 위해 사택을 내어주고 밥상을 대령하기도 했다.
방학철에는 도시 큰 교회 수련회 장소 관리인이 돼 교회당 안팎 청소하고 재래식 변소에 가득한 똥 푸는 일도 해야 했다. 그런데도 학업의 기회가 없던 마을 청소년을 돌보며 소설 ‘상록수’의 꿈을 하나하나 실현하려 했다. 이 와중에 사회의 빛과 소금이 돼야 할 교회가 광채도 짠맛도 잃어가는 현실을 애통해하며 ‘회칠한 무덤 한국교회여’ 등의 책을 냈다.
간간이 들려오는 미국 유학으로, 대형교회 부교역자로 부임하는 동기 소식에 부러움을 지우지 못하는 와중에 도시 교회로부터 연락이 왔다. 평소 저자의 글을 주목하던 언론인 출신의 목사였다. 늙어서인지 이젠 설교의 관심 주제가 ‘죽음’이 돼 버린 자신의 초라함은 저물고 미래세대를 위한 헌신할 역동적 목회적 리더십이 교회에 필요하다고 했다.
눈물 흘리는 7년 인연의 시골교회 교인을 뒤로한 채 올라온 서울은 청계천 변 가난하고 병든 이들로 가득한 동네였다. 새로운 어려움, 새로운 도전이었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마음에 저자는 오자마자 강단에 무릎을 꿇었다. 아내는 환자 교인을 데리고 유명 권사의 병 고침을 위한 기도를 받게 했다.
그리고 본인도 그 은사를 받고자 40일간 밤샘 기도를 했고 하나님은 응답했다. 현대 의학이 포기한 이들이 모여들었다. 덩달아 교회에는 기도의 불이 붙었고 부흥이 일었다. 하루 한 번의 새벽기도회도 어렵다는데 교인들은 밤에도 모여 이름하여 ‘9시 기도회’로 교회의 버팀목이 됐다.
목회란? 인자함이 선명함을 이긴다 “기복주의, 종말론에 곁눈질 아쉬워”
저자 김태복 목사는 이 책에서 부흥에 몰두했던 초년기와 시행착오를 성찰한 뒤 더욱 원숙해진 중년기, 퇴임 전후 원로가 된 이후의 지혜를 나누는 노년기 목회로 나눠 자기 경험을 솔직한 어조로 토로했다. 성공담만 나열하지 않았다. 시한부까지는 아니었으나 ‘임박한 종말’을 추단하다 더 과감한 미래세대 교육 투자를 시도하지 못한 점, 광풍처럼 일었던 기복주의·번영신학을 거르지 못하고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이들에 상처를 주지 않았는지 돌아보기도 했다.
저자는 아울러 신앙적 소신의 선명함보다, 관용과 배려의 예수 정신이 목회의 기본임을 성찰하기도 했다. 교인의 비밀과 치부는 끝까지 함구했고 혹여 허물이 드러나도 인내하고 기도하며 개과천선을 기다렸다. 교회를 민주적 공동체로 꾸리기 위해 애썼다.
모든 교회 예결산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장로 안수집사 권사 등 중직을 일정 수대로 정기적으로 선출하도록 했다. 소득 수준이 편중되지 않도록 (즉, 부자에 쏠리지 않도록) 중직 취임 시 헌금상한액을 뒀다. 다양한 언로를 허용해 그의 교회에는 군사정권의 독재를 규탄하는 대학부 학생의 대자보가 붙을 수 있었다.
특정 지역 출신 교역자를 배제하는 교단 문화와는 빗장을 걸고 전국 방방곡곡 사투리가 넘치는 교회 공동체로 바글바글하게 했다. 저자는 2007년 66세 조기 은퇴하면서 피 한 방울 안 섞인 후임 목사에 담임목사직을 이양했다. 그는 목회직 이양에서 전임자 목회의 성패가 달려 있다며 담임목사가 온전히 설 수 있도록 계속 지지하고 뒷받침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그렇게 실천했다. “교인 찾아오기 힘들게”(!) 남양주 덕소로 이사했다.
책에서 저자는 뒤에 가정 목회 이야기를 다뤘다. 한국 강원도 영월에 평화주의 신앙공동체를 뿌리내리는 데 힘쓰는 딸 김지연·사위 오정환 가정, 한국 사회 가스라이팅을 타파하기 위해 애쓰는 목회자 큰아들 용민·며느리 정현주 가정, 대중음악과 기독교 음악 창달에 앞장서는 PD인 작은 아들 용범 가정 이야기와 올 1월 소천한 아내 최재희 권사 이야기가 담겼다.
책 속으로 간악한 일제와 혼란한 해방정국에서 유년기를 보냈다면, 소년기에는 전쟁 전후 극심한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안남미라고 들어봤습니까? 베트남 쌀인데, 찰기가 없어 맛이 형편없고 영양 면에서도 평판이 안 좋았어요. ‘이 쌀을 먹으면 사내는 몸이 가벼워져 바람 부는 날에는 날아간다’는 루머도 있었지요. 이 쌀이 전부였고, 어쩌다 운 좋은 경우에나 미군이 내다버린 ‘꿀꿀이죽’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덕지덕지 꿰맨 낡은 내의와 양말, 검정 고무신을 신고 자란 우리에게는 오직 하얀쌀밥에 고깃국을 실컷 먹는 것이 소원의 전부였습니다. (20쪽)
부모님은 내가 앞으로 농·상업 분야로 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는지, 아버지의 도장포 가게 앞에 좌판을 차리고 낮에 장사하게 시켰습니다. 어릴 때부터 군소리 없이 집에서 기르던 소의 꼴을 베어 오고 겨울이면 10리 길을 마다않고 나무를 구해오기도 하며,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거들었기 때문에 집안경제를 책임지기로는 제가 적격이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좌판에는 양말이나 비누 등 일용품과 잡지 등을 놓았는데, 장사는 3개월 만에 끝났습니다. 손해만 났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움이 많아 고개 푹 숙이던 사춘기 소년에게 노점상은 실로 무리한 일이었습니다. 지나가는 아무나 값나가는 것들을 집어가서 매대가 텅텅 비기 일쑤였으니까요. 만약 그때 내가 장사에 수완을 보여 수입을 올렸더라면 인생의 판도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30쪽)
사실 나는 박정희를 위시한 젊은 군인들, 특히 미국 웨스트포인트에서 직수입한 엘리트 교육을 받은 육사 출신들이 시도하는 국가 개혁에 은근히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러다 민족의 스승들이 폭로하는 군사정권의 검은 정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대학마다 거대한 저항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을 때, 나는 춘천농과 대학생의 일원으로 데모에 동참했습니다. (36~37쪽)
나는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한 청소년을 위해 재건학교를 세워 그들을 양육했습니다. 그러나 산업화의 바람이 청정한 이 마을에 몰아닥치고 청춘들은 새떼처럼 도시로 떠나버렸습니다. 미래가 사라져버린 듯 보였습니다. 이 와중에 서울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회칠한 무덤 한국교회여〉를 읽은 김관호 목사님이었습니다. 담임목사 청빙을 제안하신 것입니다. 새로 부임한 홍익교회는 서울에 자리했지만, 결코 화려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서울 드림’을 안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수도 중심부에 접근하지 못한 채, 한양대학교 뒤 청계천 하구에 판자촌을 이뤄 살던 동네, 그곳에 있었습니다. 서울 밑바닥의 온갖 궂은일을 담당하고 있던 그들이지만, 언제든 경기도 광주로 강제 집단이주 당할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교회도 어떻게 쓸려갈지 모를 불확실성, 모호성의 기반 위에 서 있었고요. (48쪽)
부끄러운 이야기인데, 40년 목회를 마치고 은퇴한 후에야 비로소 나는 고난받는 이들의 실상이 보였어요. 특히 설교단에서 내려온 이후 ‘약자 보호법’의 본질을 제대로 알게 됐어요. 구약성경 시대의 이 법은 사회, 경제적으로 배제되고 소외당한 계층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관심을 확증하는 법이지요. 출애굽기 22장 21절에서 26절에 언급한 율례에 의한 하나님의 자비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않고, 과부와 고아를 해롭게 하지 않으며, 가난한 자에게 이자 없이 꾸어주고, 이웃의 옷을 저당 잡더라도 해지기 전에 돌려주라는 명령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현대사의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면 역사 속에 생동하셔서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56~57쪽)
한국교회 초기, 악취 나는 환경 속에서도 고통받는 환자를 가리지 않고 치료하고 오막살이에서 새우잠 자며 목숨 걸고 복음을 전했던 많은 선교사의 희생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학교와 병원, 사회사업기관 등 신문물을 가져와 한국의 근대화를 선도한 것 또한 서구 교회였습니다. 게다가 을사늑약 이전 우리 영토에서 벌어진 청일, 러일전쟁 당시 한국인의 안전을 지켜주고 심지어 교육까지 해준 곳이 외국인 선교사가 세운 교회였습니다. 교회는 당시만 해도 치외법권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한국인에게 기독교는 피난처 역할을 했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애국지사나 지식인이 망해가는 국가를 회복할 새 이념으로 기독교를 수용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선교사 상당수는 근본주의 노선이었습니다. 이같이 한 쪽에 쏠린 신학은 한국교회에 많은 병폐를 낳았습니다. 거룩함과 세속을 편 가르는 이원론적인 신앙, 문자를 숭상하는 성경 해석은 한국교회 특유의 배타적 신앙의 이론적 뿌리였습니다. 게다가 제국주의 일본과 결탁한 상당수 선교사는 교회 내 정치활동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복음전파 보장과 저항을 맞바꾼 것이지요. 이렇게 교회가 교회만의 성장에 몰두하는 사이 복음을 전하는 땅에서 재산을 불려 귀국하는 선교사가 늘어났습니다. 탄광, 금광, 벌목, 철도부설 사업에 손을 댄 것입니다. 그렇게 불의하게 결탁한 선교사 집단은 태평양 전쟁 국면에서 발톱을 보인 일본에 의해 신앙의 자유를 억압받더니 끝내 축출되고 맙니다. (69~70쪽)
나는 교회를 민주적으로 운영하고자 애썼습니다. 그 노력의 출발점은 재정투명성이었습니다. 주보에 매주 헌금수입을 자세히 수록하고 한 달에 한 번씩 제직회를 통해서 재정지출을 보고했습니다. 당회장이지만 함부로 재정지출을 하지 않고 장로님들과 의논했습니다. 담임목사는 물론, 부교역자 사례금을 단번에 올리지 못하도록 호봉제로 했고 이를 제도화했습니다. 인재등용 역시 공정하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다른 교회에서는 사회적 신분이나 재산으로 중직에 발탁되는 일이 허다한 1980년대 초반, 출신지역, 학력, 재산의 편차를 느끼지 않게 했습니다. (74~75쪽)
다음 주일 아침예배 공고 때 “이제부터 정치적인 이유로 서로 비판하거나 다투는 일이 생길 경우 더 이상 두고 보지 않겠다”라고 경고성 당부를 했다. 다행히 교우끼리 정치적 발언을 자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자로 잰 듯한 기계적 중립은 옳지 않다.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된다면 비판 대상이 어느 정파 소속이든 할 말을 해야한다. 물론 논리적 빈틈이 없도록 탄탄한 원고를 작성해야 함은 불문가지다. 그러나 이 정도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념이 세대나 소득 수준으로 갈린 이 사회의 갈등을 봉합하는 데 교회가 역할을 해야 한다. 자신의 짧은 정치 식견을 늘어놓으면서 세상 권력자 앞에 세 과시하려는 모든 욕망은, 세상이 화해하고 일치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므로 당장 멈춰야 하는 것이다 (127쪽)
어느 해인가, 교회에 충성하던 교우의 시골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조립식 주택이지만 잔디로 잘 가꾼 정원 등 모든 것이 최상이었다. 그래서 “아니, 서울 아파트에 주로 살면서 여기 시골집은 왜 이렇게 많은 돈을 들여 꾸며 놓으셨는가?”라고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 이랬다. 20대의 큰아들을 오토바이 사고로 잃었을 때, 부부가 너무 힘들어 이 시골집을 꾸미며 번뇌를 잊었다는 것이다. 아들이 보고 싶을 때면 부부가 일하면서 눈물 대신 땀을 흘리고 그래도 못 잊을 때면 기도했다고 한다. 그 고백을 듣는 순간, 각 가정의 실존적 어려움을 도외시한 나 자신이 많이 부끄러웠다. 아마 그 당시에도 강단에서 열심히 성공과 복을 강조했을 것이다. (151~153쪽)
후임 담임목사 안착은 3년이 고비다. 처음 부임하고 3년은 허니문 기간이다. 그 기간에는 웬만한 허물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후임목사가 전임자 때보다 더 교회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3년 동안 너무나 밀어붙이는 목회 방법으로 일관하다 보면 교인은 지치기 마련이다. 그때 전임자의 여유 있던 목회 방법이 왠지 그리워지게 되면서 담임목사 지도력에 불만을 느낄 수 있다. 그때가 원로목사에게도 가장 조심할 때다.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자신에 대한 교인의 관심이 멀어지면 섭섭해진다. 이때 교인이 찾아와 담임목사의 목회 방법에 대해 불만을 토하면 쉽게 동조하기가 쉽다. 안 된다. 그때 단호한 태도로 담임목사를 옹호해줘야 한다. (171쪽)
목회자가 현직에서 시무할 때는 기도를 많이 한다. 또 그래야 한다. 목회는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만 감당할 수 있고 또한 열매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실한 목회자는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골방이고 교회고 산이고 간에 기도가 일상화돼야 한다. 나의 무탈한 목회 40년 이유는 기도에 전력을 기울였던 것에 있다. 특별히 내가 목회한 교회는 가난한 사람이 대부분이요, 그들은 인력으로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난치병, 사업실패, 가정불화 등)를 안고 살았다. 따라서 기도 없는 목회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렇게 기도에 솔선하니 교회에도 기도의 불이 붙었다. 그에 따라 교회도, 교인도 성령에 불타는 모습을 생생하게 발견할 수 있었다. 많은 간증이 양산되는 것은 당연했다. (172쪽) <저작권자 ⓒ 법률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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